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Apr 22, 2025)
인도의 철학자가 썼다고 하는, 유명한 책을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는데, 제목을 쉽게 해석하기 어려운 것처럼 책도 쉽지 않았다. 꼭 선문답 같기도 하지만, 어슴프레하게 작가가 하려고 하는 말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다음에 몇 번, 곱씹어 읽어봐야겠다. 물론 이번에 읽을 때에도 같은 부분을 몇 번을 다시 읽어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래도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았고, 어려운 문장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문장의 해석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전달하려고 하는 말을 이해하는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내가 문해력이 줄어들기도 했을 것이고, 작가의 사고력이 너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내가 어떤 무엇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잊고 그 자체를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게 진짜 ‘안다’라는 것인지는 아직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이미 무엇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생각,기억..)이 우리의 사고를 제한시키고 실제 그것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을 막고, 따라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해야할 것 같지만, 너무나도 고차원적이기 때문에 어렵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말이다.
명상은 모든 것을 완전한 주의력을 가지고 보는 것, 즉 그것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하게 보는 마음의 상태다. 아무도 당신에게 주의 깊게 기울이는 법에 대해 가르칠 수 없다. 만일 어떤 체계가 당신에게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체계에 대해 주의 깊은 것이지 그것이 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들은 나를 뜨끔하게 하면서 무엇인가에 대해 더 자세히, 깊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드는 부분들도 있었다.
어떤 근본적인 것을 알고 발견하려면 깊이 들어가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둔탁한 도구, 무딘 도구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도구를 예리하게 해야 하는데, 도구란 곧 마음이다. 그 모든 정당화와 비난에 의해 둔해진 마음이 바늘처럼 예리하고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할 때에만 당신은 깊이 파고들 수 있다.
당신의 제약된 마음, 생활방식,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구조는 당신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즉각적으로 자유로워지지 못하게 한다.
그리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이었지만, 하나하나의 내용들이 모두 밑줄을 긋게 만드는 것들이라서 적어둔 부분들이 무척 많았다. 가끔씩 들춰서 다시 봐야겠다.
아래는 좋았던 부분들.
저자는 우리에게 정말 살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완전한 변화―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다―즉 내적 혁명을 강조한다. 그러려면 ‘과거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어제(즉 아는 것)에 대해 죽어야 오늘이 있고, 매순간 죽어야 매순간 산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시간이 가면 나도 뭔가 달라지겠지⋯ 해서는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당장, 즉각적으로만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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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주는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모범을 따름으로써 우리의 행동과 생각은 기계적이 되고 우리의 반응은 자동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들 안에서 쉽게 관찰될 수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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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알아야 할 첫 번째 것이다. 즉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찾을 때 사실 당신은 다만 진열장을 구경하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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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진리는 살아 있다. 죽은 것은 정적(靜的)이기 때문에 길을 갖고 있지만, 진리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서 쉴 곳이 없다. 어떤 절이나 교회에도 없으며 어느 종교나 선생, 철학자 그 누구도 당신을 진리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은 이 살아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당신은 분노, 잔인성, 폭력, 절망 그리고 고민과 슬픔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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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또 당신은 “나는 나 자신 안에 근본적인 내적 변화가 필요함을 알지만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고, 그리로 향하도록 나를 도와 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변화 자체가 아니다. 즉 당신은 기본적인 혁명에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다만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어떤 방법이나 체계를 찾고 있는 데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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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이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체계와 마찰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의향이나 경향과 억압들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거기엔 늘 모순이 있게 된다. 그 결과 그 체계의 이데올로기와 실존의 현실 사이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려고 하면서 당신은 자신을 억압하게 되는데, 사실 진정으로 참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다. 만일 다른 사람과 똑같이 자신을 탐구한다면 당신은 항상 남의 말만 듣고 따라가는 이차적인 인간에 머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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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변하기를 바란다,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일견 매우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는 자신 안에 질서를 가져다줄 권위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가 내적 질서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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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모든 권위를 거부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신이 오랫동안 지녀오던 그릇된 것을 거부할 때, 그리고 모든 짐을 벗어던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은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추진력, 더 큰 강도와 생명력을 갖는다. 만일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 짐을 벗어던지지 않은 것이며, 생명력 없는 권위라는 무게를 벗어던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던졌고 그 속에 전혀 두려움―실수에 대한 두려움, 옳은 일 또는 나쁜 일을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그런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면, 그 에너지 자체가 변화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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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에 의해서 자신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 관해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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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에 앉아서 자신에 관해 명상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다. 나는 나 혼자 있을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 사물들, 생각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내적 사물과 마찬가지로 외적 사물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탐구해야만 나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다른 형태의 이해는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추상 속에서는 자기를 탐구할 수가 없다. 나는 추상적 실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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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존 또는 현실 속에서 나를 탐구해야 한다. 즉 내가 바라는 ‘나’가 아니라 지금 있는 ‘나’를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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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 자신과 함께 살아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정적 상태가 아니라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과 더불어 살려면 당신의 마음 역시 살아 있어야 한다. 만일 마음이 의견들 그리고 가치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결코 살아 있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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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신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겸손이 필요하다. 만일 “난 나 자신을 알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출발한다면, 당신은 이미 자신에 관해 배우기를 멈춘 것이다. 또 만일 “나는 단지 기억, 관념, 체험과 전통들이 모여 있는 하나의 꾸러미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에 관해서는 배울 게 많지 않다”라고 해도 당신은 역시 자신에 관해 배우기를 멈춘 것이다. 당신이 뭔가를 성취하는 순간 당신은 그 천진성과 겸손이라는 속성을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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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이 제약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심지어 나무를 보면서 “이건 참나무”라거나 “이건 보리수”라고 말할 때조차 그 나무의 명명(命名)―이것은 식물학적 지식인데―이 자신의 마음을 너무 제약하는 나머지 당신이 그 나무를 진정으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나무와 접촉하려면 나무에 당신의 손을 대야 하는데, 말은 당신이 그것과 접촉하는 것을 돕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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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쾌락을 비난하지 않고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추구한다면 눈을 뜨고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즉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은 반드시 그것의 그림자인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점을 알면서 추구하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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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은 지각, 감각, 접촉, 욕망이라는 네 단계를 거쳐 존재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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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예쁜 구름, 하늘 높이 맑게 솟은 산, 봄에 방금 눈튼 잎, 아름다움과 웅장한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계곡, 장엄한 황혼 또는 아름다운 얼굴―총명하고 생기 있으며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는, 그래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얼굴―을 본다고 하자. 나는 강렬한 기쁨을 가지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내가 그것들을 바라볼 때 거기에는 관찰자가 없고 오직 사랑과도 같은 순수한 아름다움만이 있다. 잠깐 동안 나는 모든 문제, 불안, 불평을 잊는다. 거기엔 오직 놀라움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기쁨으로써 그걸 볼 수 있고 다음 순간 그것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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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마음이 찾아들어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즉 내 마음은 본 것에 대해 거듭 생각하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자꾸 보아야겠다고 혼자 생각한다. 생각은 비교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며 “내일 다시 그걸 해야지”라고 말한다. 잠깐 동안 기쁨을 주었던 체험의 연속은 생각에 의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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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그 즐거움을 되씹어 보며 그것을 쾌락으로 만든다. 생각은 그 체험을 되풀이하고자 하며, 그래서 되풀이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더 기계적으로 변한다. 그것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은 쾌락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생각은 욕망을 통해서 쾌락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며, 그 결과 어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은 생각에 의해 뒤틀리게 된다. 생각은 그것을 기억으로 만들며, 그 기억을 되풀이 생각함으로써 기억은 또다시 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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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억은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날의 삶에서 기억 없이는 우리는 제구실을 다 할 수가 없다. 기억이 자신의 자리에서는 쓸모가 있지만, 그것이 거의 필요없는 마음의 상태가 있다. 마음이 기억에 의해 불구가 되지 않아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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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낡은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즐거움을 가지고 보고 잠깐 동안 엄청나게 느꼈던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당신은 낡은 것에서 쾌락을 끌어내지, 결코 새로운 것에서 끌어내지 않는다. 새로운 것 속에는 시간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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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일 기어들어오는 쾌락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 ―가령 어떤 얼굴, 새, 옷, 색깔,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水面)의 아름다움 또는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을 그렇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만일 당신이 그 체험이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고통도 공포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엄청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쾌락을 되풀이하고 영속화시키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쾌락은 고통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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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말이 그것 자체의 떨림, 그것 자체의 이미지를 갖고 있듯이 말 자체는 어떤 떨림을 가져온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죽음에 관해 마음속에 갖고 있는 이미지, 당신이 본 수많은 죽음의 기억, 그리고 그 사건과 당신과의 연관, 그렇다면 공포를 낳는 것은 이미지가 아닌가? 당신은 종말을 낳는 이미지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종말에 이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죽음이라는 말이 당신의 공포의 원인인가 아니면 실제의 종말이 원인인가? 만일 당신의 공포가 말이나 기억 때문이라면 그것은 전혀 공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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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즉 시간 속에서, 내일이나 모레 일어날 어떤 사실을 두려워한다.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생각은 그 상태를 체험했다. 즉 죽음을 관찰함으로써 생각은 “나는 곧 죽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생각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낳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떤 공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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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떤 것을 즉각적으로 대할 때 거기엔 아무런 공포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에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공포가 없는 마음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려면 사고, 기억, 시간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머리로만, 말로만 이해하지 않고 가슴으로, 마음으로, 진심으로 이해할 때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마음은 공포를 낳지 않고 생각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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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신이 심리학자의 말이나 나의 말을 따른다면, 당신은 우리의 이론, 우리의 도그마, 우리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프로이트나 융 또는 나를 통해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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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는 오직 하나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은 바뀌지만 욕망은 언제나 똑같다.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여러 가지 일들을 두려워하지만 오직 하나의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공포가 나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당신은 이 무의식의 문제를 물리쳤고 심리학자와 분석가들을 용케 벗어났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공포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단일한 움직임임을 이해할 때, 그리고 당신이 그 움직임이 지향하는 대상이 아닌 그 움직임 자체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다음과 같은 엄청난 질문에 부딪힌다. 우리 마음이 그동안 해온 단편화 과정 없이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어떻게 그 전일(全一)한 그림을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단편화된 삶을 살아왔으며, 생각의 단편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그 전일한 공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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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해서 서로 생각을 달리하는 두 개의 학파가 있다. 하나는 “폭력은 인간이 본래 타고난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폭력은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적 · 사회적 유산의 결과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 파에 속해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이지, 왜 폭력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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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근본적인 것을 알고 발견하려면 깊이 들어가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둔탁한 도구, 무딘 도구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도구를 예리하게 해야 하는데, 도구란 곧 마음이다. 그 모든 정당화와 비난에 의해 둔해진 마음이 바늘처럼 예리하고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할 때에만 당신은 깊이 파고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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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제약된 마음, 생활방식,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구조는 당신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즉각적으로 자유로워지지 못하게 한다. 당신은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거야. 나는 자유로워지려고 해볼 거야”라고 말한다. ‘해 볼 거야’라는 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우려할 만한 진술 가운데 하나다. 해본다는 것은 없으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없다.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당신은 뜸을 들이고 있다. 전세계와 자신 안의 폭력 때문에 집이 불타고 있는데 당신은 이렇게 말했다. “어디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이데올로기가 저 불을 끄는데 가장 좋을까?” 집이 불타고 있을 때, 당신은 물을 나르는 사람의 머리카락 색깔에 관해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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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미지 형성, 방어 메커니즘에 근거 하고 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들 각자는 상대방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며, 이 두 개의 이미지―사람들 자신이 아니라―가 관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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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관계를 갖는 것은 모두 이 이미지들이다. 이미지가 형성되고 나면 두 사람 또는 많은 사람들 사이의 실제 관계는 완전히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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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대단히 정열적이고 지속적인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육체적 · 지적 에너지뿐만 아니라 어떤 동기, 심리적 자극 또는 약물에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자극에 의존한다면 그 자극은 곧 마음을 둔하고 무감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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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한테 강연하는 것이 나에게 아주 자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청중을 필요로 한다는 걸 잘 안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왜 나는 의존하는가? 왜냐하면 나 자신 안에서 나는 깊이가 없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 자신 안에 항상 넘치고 풍부하고 활력 있고 움직이며 살아 있는 원천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의존한다. 나는 그 원인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발견했다고 해서 내가 의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원인의 발견은 다만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내 마음을 의존성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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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는 있는 것을 실제로 본다. 나는 좋고 싫고에 상관없이 그것을 본다. 나는 그 의존을 없애고 싶지도 않고 그것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것을 관찰하고 그러한 관찰이 있으면 나는 그림의 조각이 아니라 그림 전부를 볼 수 있으며, 또 마음이 그림 전부를 볼 때 자유가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단편화가 될 때 에너지가 분산됨을 알았다. 나는 에너지 분산의 원인을 바로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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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있어야 하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분열이 있는 한 반드시 갈등은 있게 마련이고 모든 갈등은 에너지의 분산을 의미한다. 스스로 “어떻게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갈등은 증가하게 된다. 반면, 당신이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보듯 그것을 사실로서 분명히, 똑바로 보기만 한다면, 당신은 아무런 갈등도 없는 삶의 진실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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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달리 얘기해 보자. 우리는 언제나 ‘그런 우리(있는 우리)’ 와 ‘그래야 하는 우리(있어야 하는 우리)’를 비교한다. ‘그래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의 투영이다. 비교가 있으면 갈등이 있는데, 이 비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과의 비교를 말하며 따라서 ‘있었던 것’과 ‘있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게 된다. 아무 비교가 없을 때에만 ‘있는 것’ 이 있으며, ‘있는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은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절망, 추악함, 잔인성, 공포, 불안과 같은 자신 안에 있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기울일 수 있고, 그것과 더불어 완전히 살게 된다. 그러면 모순이나 대립이 사라져 아무런 갈등이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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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자신을 다른 것 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될 것이다. 비교함으로써 당신은 발전하고자 하고, 성숙하고자 하고, 더 이지적이고자 하며, 더 아름다워지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까?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며, 당신은 비교함으로써 그 사실을 조각낸다. 그리고 이것은 또 에너지의 낭비다. 비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에게 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준다. 비교 없이 자신을 볼 수 있을 때 당신은 비교를 넘어서 있는 것인데, 이것은 마음이 만족으로 침체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이 어떻게 에너지를 낭비하는지를 본질적으로 알고 있으며, 이것은 삶의 전체성을 이해하는 데 너무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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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 의식, 모든 걸 회의하고 질문하는 자유이며 따라서 아주 강렬하게 집중적이고 능동적이고 활기에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의존, 예속, 순응, 수락을 내던진다. 그런 자유에는 완전히 혼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토록 의존적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자란 마음이 그런 자유, 즉 완전히 고독하고 아무 리더십도 전통도 권위도 없는 그런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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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립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아픔을 당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기 둘레에 벽을 쌓고 또 다른 형태의 괴로움인 이탈을 도모하며, 이데올로기의 허황된 상아탑 속에 사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고독은 이것과 아주 다르다. 당신은 기억으로 가득차고, 제약투성이이며, 어제의 투덜거림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결코 고독하지 않다. 즉 당신의 마음은 그동안 그것이 축적해 온 쓰레기들을 깨끗이 비우지 않은 것이다. 고독하려면 과거에 대한 모든 것들을 버려야만 한다. 당신이 고독할 때, 즉 어떤 가족에도 속해 있지 않고 어떤 나라에도, 문화에도, 특별한 대륙에도 속해 있지 않고 완전히 고독할 때, 국외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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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과 친근하게 같이 살 때에만 당신은 같이 사는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에 익숙해지는 순간―그 익숙해지는 것이 자신의 불안이든 선망이든 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당신은 더 이상 그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강가에서 산다면 며칠이 지난 뒤 당신은 더 이상 그 물소리를 듣지 못하며, 또 만일 당신이 방 안에 그림을 하나 걸어 놓고 매일 본다면 몇 주일 뒤 당신은 그것을 잊어버린다. 그것은 산이나 계곡이나 나무에서도 마찬가지며, 당신의 가족이나 남편이나 아내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질투, 선망, 불안 같은 것과 더불어 살 때 당신은 그것에 익숙해져서는 안 되며 그것을 수락해서도 안 된다. 새로 심은 나무를 햇빛이나 폭풍으로부터 보호하듯 그것을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그것을 비난하거나 변명하지 말고 보살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럴 때 당신은 질투하고 불안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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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문해 보자. 이 자유, 이 고독,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전 구조(構造)와의 만남이 시간이 흐르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즉 자유가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을까? 분명히 성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이 시간을 끌어들이자마자 당신은 자신을 더욱더 노예화시키기 때문이다. 당신은 점진적으로 자유롭게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다음은 이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그 자유를 의식할 수 있을까? 당신이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지나간 어떤 것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자유는 원망(願望), 소원, 갈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연스럽게 올 뿐이다. 당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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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시간에 의해 산다.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 즐겨하는 도피의 게임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 변화가 시간 속에서 이룩된다고 생각하며, 자신 안에서의 질서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고 하루하루 증가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질서나 평화를 가져오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점진성(漸進性)의 관점에서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순간순간 질서 있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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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대순의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을 아는가? 그것은 생각과 행동의 간격이다. 생각이란 분명히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안전하려는 생각이다. 행동은 언제나 즉각적이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아니고 미래의 것도 아니다. 행동은 언제나 현재 속에서 가능하지만, 행동이 너무나 위험하고 불확실한 나머지,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안전함을 줄 것이라고 기대되는 생각에 순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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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간격, 행동이 있다. 그리고 그 간격 속에 시간의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그 간격은 본질적으로 생각이다. 당신이 장차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할 때, 당신은 시간 속에서 어떤 결과를 성취한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는다. 생각은 관찰을 통해서, 욕망을 통해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생각에 의해 유지되는 끝없는 욕망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장차 나는 행복해질 거야. 장차 나는 성공할 거야. 장차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될 거야.” 그래서 생각은 시간인 그 간격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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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묻는다.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내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을 만큼 완전하게 살 수 있을까? 왜냐하면 시간은 슬픔이기 때문이다. 즉 어제 또는 수많은 어제로 되어 있는 지난날, 당신은 사랑했고 또는 지금은 가버린 친구를 가졌었다. 그리고 기억은 남아서 지금 당신은 그 쾌락과 고통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돌이켜보고 원망(願望)하고 희망하고 후회하며 그래서 생각은 그것을 되풀이하면서 우리가 슬픔이라고 부르는 것을 키우고 시간에 연속성을 준다. 생각에 의해 키워진 이 시간의 간격이 있는 한, 거기엔 슬픔이 있고 계속 된 공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간격이 끝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한다. 만일 당신이 “그것이 과연 끝날까”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생각이고 당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며, 따라서 당신은 간격을 갖는 것이요 그래서 당신은 다시 붙잡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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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람들에게 중대한 문제인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은 죽음을 알며, 그것이 매일 당신 옆에서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죽음을 문제삼지 않을 만큼 완전하게 그것과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만나려면 죽음에 관한 모든 신념과 희망과 공포가 끝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어떤 결론, 이미지, 미리 생각한 불안을 가지고 그 별난 것을 만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당신은 시간과 더불어 그것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의 간격이다. 즉 관찰자인 당신은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즉 당신은 그것에 관한 모든 종류의 희망과 이론을 갖고 있다. 당신은 윤회나 부활을 믿으며 시간을 초월한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정신적 실체, 즉 아트만(atman)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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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는 까닭은 당신이 그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 죽음은 말이며, 공포를 낳은 것은 이 말이요.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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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생각이 죽음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생각의 장(場) 안에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영속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각의 장 안에는 영속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속적인 것이 없다는 발견은 엄청나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당신 자신을 볼 수 있으며 그러면 거기엔 커다란 기쁨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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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를 키우는 생각은 이렇게 말한다. “그걸 미루자, 그걸 피하자, 될 수 있는 대로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 당신이 “나는 그걸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때, 이미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피할까를 생각한 것이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한 까닭은 당신이 그것을 뒤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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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며, 따라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을 두려워하는 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불안전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안전이 없다는 것을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안전이 없으면 끝없는 움직임이 있으며 그래서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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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것은 완전히 마음을 비우는 것을 뜻하며, 그것의 일상적인 소망, 쾌락, 괴로운 격정들을 비우는 것이다. 죽음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변화이며, 그 안에서 생각은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각은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을 때 거기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죽음이며, 그러면 당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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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한테 속해 있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는 순간 나는 너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내가 성적 요구나 다른 요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너한테 의존하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순간 나는 너를 싫어한다.” 다시 말해 당신과 그녀 사이에는 적대감이 있고 분리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그녀에게서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모든 대립 상태나 자신 안에서의 끝없는 불평 없이 아내와 살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아마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완전히 자유로우면 그녀도 자유롭지만, 당신이 자신의 모든 쾌락을 위해 그녀에게 의존한다면 당신은 그녀의 노예다. 사랑할 때는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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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당신은 모르는가? 증오 없이, 질투 없이, 분노 없이, 그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바에 간섭하려고 하지 않고, 비난 없이, 비교 없이 사랑하는 것, 당신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비교가 있는가? 당신이 어떤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온 심장을 다해, 온몸을 다해, 당신의 전 존재(存在)를 다해 사랑할 때, 거기에 비교가 있는가? 당신이 그 사랑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칠 때 거기엔 다른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책임이나 의무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 그 말들이 합당한가? 당신이 무슨 일을 의무적으로 할 때, 거기엔 사랑이 들어 있는가? 의무 속에는 사랑이 없다. 사람이 묶여 있는 의무는 구조는 그를 파괴한다. 어떤 일을 의무이기 때문에 강제로 하는 한,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엔 의무도 책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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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접촉을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지적 능력을 발전시키게 된다.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미술관과 연주회를 가고, 텔레비전을 보며 그밖에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용하고 예술에 관해 많은 생각과 말을 한다. 왜 우리는 예술에 그다지도 의존하는 것일까? 그것은 도피의 한 형태이자 자극의 한 형태인가? 만일 당신이 자연과 직접 접촉한다면, 나는 새를 보고, 하늘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고, 언덕 위의 그림자들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그림을 보기 위해 미술관에 가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주위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더 잘 보기 위한 자극을 얻으려고 약물에 의지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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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가령 나무 같은 객관적 사물을 아무런 연상작용 없이, 그것에 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지식도 없이 아무런 편견이나 판단 없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어떠한 말도 없이 그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그렇게 해보라.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다해, 자신의 에너지 전부를 기울여 나무를 볼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라. 그 강렬함 속에서 당신은 관찰자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오직 주의력만이 있을 뿐이다. 부주의가 있을 때 거기엔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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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자기 포기와 함께 나무나 별 또는 반짝이는 강물을 보는 마음만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며, 우리가 정말로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사랑의 상태에 있게 된다. 흔히 비교를 통해서 또는 사람들이 짜맞춰 놓은 생각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아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름다움을 어떤 대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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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어제의 당신을 알았다는 얘기다. 나는 지금의 당신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당신에 대한 이미지일 따름이다. 그 이미지는 당신이 나를 찬양하거나 모욕하려고 한 말, 당신이 나에게 한 일 등으로 짜맞춰진 것이고―내가 당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기억으로 짜맞춰진 것이다―당신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또한 같은 방식으로 짜맞춰진 것이다. 관계를 갖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며,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하나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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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신이 어떤 문제에 쏟는 주의력 바로 그것이 문제를 푸는 에너지다. 당신이 자신의 완전한 주의력을 기울일 때, 즉자신의 모든 것을 기울일 때 거기엔 관찰자가 없다. 거기엔 순전한 에너지로서의 주의 상태가 있을 뿐이며, 그 순전한 에너지는 총명의 가장 높은 형태다. 그런 마음의 상태는 당연히 완전한 침묵일 것이며, 그 침묵, 그 고요―훈련된 고요가 아니라―는 완전한 주의력이 있을 때 찾아온다. 관찰자도 관찰되는 것도 없는 그 완전한 침묵이 종교적 정신의 가장 높은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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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새로운 사실이 생각에 의해 보여질 수 없다. 새로운 사실은 나중에 생각에 의해 언어상으로 이해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사실의 이해는 생각에 대해 실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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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고독과 내적 공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고, 가고, 기능하고, 하늘을 나는 자유를 뜻하기 때문이다. 미덕이 자유가 있을 때에만 꽃피듯이 선(善)은 공간 속에서만 꽃필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가질 수 있겠지만, 내적으로 자유롭지 않으며 따라서 거기엔 공간이 없다. 자기 자신 안에 이 거대한 공간 없이는 어떤 값진 미덕이나 성질도 기능하거나 자라나지 못한다. 그리고 공간과 침묵이 필요한 까닭은, 마음이 외롭고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훈련되지 않고 무수히 잡다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을 때에만 마음이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침묵할 때에만 명징(明澄)할 수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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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모든 것을 완전한 주의력을 가지고 보는 것, 즉 그것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하게 보는 마음의 상태다. 아무도 당신에게 주의 깊게 기울이는 법에 대해 가르칠 수 없다. 만일 어떤 체계가 당신에게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체계에 대해 주의 깊은 것이지 그것이 주의가 아니다. 명상은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무에게서도 그것을 배울 수 없는데, 그 점이 바로 그것의 아름다움이다. 명상은 기술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권위가 없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배우고 자신을 관찰할 때, 당신이 어떻게 걷고 어떻게 먹는지를 관찰하고, 당신이 말하는 것 · 가십 · 증오 · 질투를 관찰할 때, 그 모든 것을 아무 선택 없이 당신 자신 안에서 알아차릴 때, 그것이 명상의 일부다. 그러므로 명상은 버스에 앉아 있거나 빛과 그림자로 가득 찬 숲속을 걸어갈 때 또는 새가 노래하는 걸 듣거나 당신의 아내나 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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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통과 절망이 있는 삶을 수락했고 그것에 익숙해졌으며, 죽음은 조심스럽게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때, 죽음은 삶과 매우 흡사하다. 당신은 죽음 없이 살 수 없다. 이것은 지적 역설이 아니다. 하루하루 마치 그것이 새로운 아름다움인 양 완벽하게 살려면 어제의 모든 것은 죽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당신은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고 기계적인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또는 자유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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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인간적인 것을 풀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추상 속으로 도망친다.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문제와 진통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일 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을 다만 정의함으로써? 교회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고, 사회는 또 그렇게 정의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일탈과 남용이 있다. 누구를 숭배하는 것, 누구와 같이 자는 것, 정서의 교환, 사귐 등이 우리가 사랑으로서 뜻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것은 규범이자 패턴이었고, 또 너무나 개인적이고 감각적이고 제한된 나머지 종교인들은 사랑이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들은 인간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쾌락, 경쟁, 질투 그리고 소유하고 유지하고 구속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간섭하려는 욕망 등을 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복합성을 아는 나머지 그들은 신성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썩지 않은 다른 종류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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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사랑만이 있을 뿐인가? 하나에 대한 것만 사랑이고 다수에 대한 것은 사랑이 아닌가? 만일 내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는 것인가? 사랑은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개인적인 것인가?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 가족적인가 비가족적인가? 당신은 전 인류를 사랑하면서 특수한 개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감정인가 정서인가? 사랑은 쾌락이고 욕망인가? 이 모든 질문은 우리가 사랑에 관한 관념을 갖고 있으며, 사랑이 어떠해야 하고 어떠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의해 발전되어 온 패턴이나 관례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규명하려면 우선 수세기 동안 쌓여온 껍데기에서 사랑이 해방되어야 하며, 그것이 어떠해야 하고 어떠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한 모든 관념과 이데올로기들을 제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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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욕망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찢기고 황폐한 세계에는 사랑이 없는데, 그럼에도 사랑 없는 당신의 일상생활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없다면 당신은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나무,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건물 또는 아름다운 여자와 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가슴과 마음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때에만 아름다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