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한낮의 일기 (May 03, 2020)
초록빛이 가득한 경주의 불국사. 연두색과 초록색, 짙은 녹색이 섞여있는 초록빛의 산 속을 걷는다. 숲 안은 짙은 색의 기와와 채도 낮은 기둥과 단청들과, 색색의 연등과 흩날리는 꽃씨들. 긴 연휴를 맞아 놀러온 여행객들이 절 곳곳을 누비는 틈에서 우리도 이곳저곳 걷는다. 연못을 지나 다보탑과 석가탑과 대웅전을 보고 관음전을 지나 작은 돌탑들이 있는 뒷길을 걷는다. 함께 여유롭게 걸으며 한낮의 시간을 보내기 좋은 풍경이다.
회색빛이 감도는 동해의 해안도로. 아랫지방은 밤부터 비가 온다더니 영덕에서 강릉까지 올라오는 길 내내 회색빛 하늘과 풍경이다. 수평선이 잘 보이지 않는 오른쪽의 바다와 짙은 색으로 풍경을 덮은 왼쪽의 산들. 음악을 틀어놓았지만 음악은 잘 들리지 않고, 우우웅 차 소음과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앞을 보며 윗쪽으로 올라간다. 회색빛의 힘없는 구름과 회색빛의 해안도로는 공기도 무거워져 낮게 내리깔게 만든다.
따뜻한 햇빛이 감싼 오후 두시의 집안 풍경. 떡갈나무와 몬스테라와 유칼리툽스와 용신목에 물을 준다. 베란다 바깥은 파란 하늘과 흰색 구름, 색색의 주택들과 흩날리는 꽃씨들. 조용히 오토바이 소리만 드문드문 들리는 조용한 마을 풍경.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향을 피우고 예전에 밴드에서 합주했던 음악들을 틀어놓는다. 여유로운 꿈을 꾸듯, 홀로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은 오후의 풍경이다.
꿈을 꾸었나 싶다.
너무 한낮이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 견딜 수 없어서 집안일이라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