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박준 시집 (Aug 02, 2016)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_ 좋더라.
미신
올해는 삼재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혀를 깨물었다
나는 학생도 그만하고 어려지는, 어려지는 애인을 만나 잔디밭에서 신을 벗고 놀았다
두 다리를 뻗어 발과 발을 맞대본 사이는
서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어린 애인에게 들었다
나는 빈 가위질을 하면 운이 안 좋다 하거나
새 가구를 들여놓을 때도 뒤편에 왕자를 적어놓아야 한다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클로버를 찾는 애인의 작은 손이 바빠지고 있었다
나는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 걸쳐있는 희끄무레한 잔금처럼 누워
아직 뜨지 않는 칠월 하늘의 점성술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_ 스무살, 멋모르고 밥을 얻어먹다가 시 동아리에 들어갔다.
누군가의 몇년 전 누군가의 십수년 전 누군가의 몇십년 전.
3월에는 매일 밥을 얻어먹고, 금요일에는 시평회를 하고(술을 마시고), 가을에는 시화전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는 마음에 닿는다. 아마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이런 시를 읽고 마음이 울리는 것을 보니, 기계가 되지는 않았나보다. 요즘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