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잔에 담긴 인문학 - 황헌 (May 11, 2025)
몇 년 전에 사두고 읽지 않았던 책을 휴가 동안 읽었다. 와인을 좀 더 알면 와인을 살 때 뭐라도 좀 알고 사고, 마실 때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사실 그 후 몇 년 동안, 와인을 마신 횟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아마 앞으로는 와인을 좀 더 자주 마시지 않을까 한다. 흥미가 생겨서, 책에서 와인을 너무 멋지게 이야기 해줘서, 다양함을 알게 되어서.
암기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 아마 책에서 읽었던 대부분의 내용은 잊어버릴 것이다. 책을 한 30페이지 쯤 읽었을 때부터, 그렇게 마음먹었다. 외우고 정리하려고 하면 아마 제대로 다 읽지도 못하고 포기해버릴 것 같으니, 차 안에서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흘러가듯 읽어야겠다고 말이다. 그러면 전체적인 구조 정도는 기억나겠지,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들춰볼 수 있을 정도의 기억은 나겠지. 그래서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서 좋았던 것은, 아주 단편적인 지식들의 모음이 아니라 와인과 관련된 전반적인 것을 갈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특정 지역들이나 와이너리, 와인들, 타닌, 아로마… 이런 것들의 구체적인 대상들이 아니더라도, 아로마라는 것이 무엇인지, 부케가 무엇이지, 어떤 와인은 라벨에 와이너리가 적혀있고 어떤 와인은 포도 품종이 적혀있는지, 스페인의 와인과 미국, 호주 등의 와인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타닌이 많으면 어떻고 적으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와인의 타닌의 많고 적음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지게 되는지, 관련된 요소들은 무엇인지, 타닌이 많은 것은 오래 숙성시키는 것이 좋다는 것 등등을 알게 되어서 좋다.
그리고 와인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들도 단편적이게나마 듣게 되어서 흥미로웠다. 백년 전쟁에 대해서도, 남아공에 좋은 와이너리가 정착되었던 역사적인 일들도, 심포지엄의 어원에 대해서도. 유명한 이들의 와인에 대한 예찬들도 좋았다.
책은 아주 기술적이고 학문적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지식과 경험들이 많이 녹아들어있었는데, 그래서 더 쉽게 읽히고 와인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특히나 기억나는 것은, 빈티지의 어원이 ‘포도를 수확하다’라는 의미에서 ‘수확한 년도’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 와인은 이 빈티지, 수확 년도가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해마다의 날씨가 다르기 때문인데, 어떻게 보면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한 현대와는 맞지 않나 생각도 들면서, 이게 훨씬 더 자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연적인 것을 너머, 인간적인 것도 생각하게 되었는데, 책에는 아래와 같은 부분이 있다.
가격이나 품질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와인은 어떤 곳에서 누구와 함께 무슨 계기로 마셨는지, 그리고 그 향에 대한 소회를 기억하는 것으로 스토리 하나씩을 만들어가면 됩니다.
어쩌며 다른 어떤 술보다, 자연적인,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와인이 이런 인간적인 이야기-추억을 만들어내는데 적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대신, 작가는 와인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도 함께 즐기는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와인에 담긴 스토리를 안다면 더 멋진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책을 읽으면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어떤 와인이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혹은 포도는 어떤 히스토리가 있는지, 와인의 유통과정은 어떤지 등등을 알고, 그에 맞는 와인을 골라 함께 마신다면 훨신 증폭된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래는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
그러나 백년 전쟁의 실체는 영토 전쟁이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왕조는 혼인 동맹을 여러 차례 맺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오늘날 보르도 일대가 포함된 가스코뉴 지방을 영국이 소유할 수 있었던 겁니다. 가스코뉴의 최대 특산품은 당대 유럽 최고 품질의 포도주였습니다. 유럽 최대의 와인 산지이자 최고 명품 생산지였던 가스코뉴를 영국이 차지한 것에 프랑스 왕조의 불만은 깊어만 갔습니다. 와인 자체도 문제였지만 세금 수입이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가스코뉴 지방에서 생산된 와인을 수출해서 얻는 세금 수입이 프랑스 내 다른 모든 지역의 와인 수출에서 나오는 세금 수입보다 많았습니다. 가스코뉴가 영국 소유다보니 그 세금은 런던으로 고스란히 넘어갔습니다. 프랑스는 이 모습을 계속 볼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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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토론회, 좌담회 혹은 학술 세미나의 뜻으로 ‘심포지엄symposium’이란 어휘를 사용합니다. 심포지엄은 고대 아테네에서 기원했습니다. 어원이 된 단어는 ‘함께 마시다’라는 뜻을 가진 ‘심포지아symposia’입니다. 심포지엄이라는 단어는 바로 포도주 때문에 탄생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인들은 대개 저녁 식사 후 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만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모이면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포도주를 즐길 것인지 결정합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사랑의 신 에로스를 주제로 토론하자는 제안이 나와서 참석자들이 와인을 마시며 즐겁게 토론했다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심포지엄엔 와인이 필수품이었습니다. 손님들을 초청한 주인이 와인을 준비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첫 잔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인 헌주식獻酒式을 한 뒤 연회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훌륭한 와인의 제조법을 가져온 신 디오니소스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각자 바닥에 와인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와인을 함께 마시며 대화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행사가 바로 심포지엄이었습니다. 심포지엄이 무르익으면 참석자 가운데 흥이 오른 이가 먼저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그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심포지엄은 고대 아테네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요소였고 중대한 의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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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아퀴나스는 후대에 와서 기독교 성인 반열에 오른 인물이지만 그 역시 포도주를 즐겨 마셨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가 남긴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숙면과 목욕, 그리고 한 잔의 포도주는 당신의 슬픔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7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말은 실감 나게 적용됩니다. 잠을 깊게 충분히 잔 뒤 목욕까지 마치고 한 잔의 와인을 마신다면, 중세나 지금이나 멋스러운 일인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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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역사와 철학은 이원론적 흐름을 수천 년 동안 이어왔습니다. 신과 인간, 하늘과 땅, 이데아와 현실, 천국과 지옥, 이성과 감성 등 수많은 이원론적 대각선 구조의 얼개를 띠며 흘러왔습니다. 포도주의 세계도 철저하게 이원론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비對比, contrast의 세상입니다. 레드 와인의 건너편엔 화이트 와인이 존재합니다. 식전주가 있는가 하면 디저트 와인도 있습니다. 구대륙 와인이 전부는 아니죠. 신대륙 와인도 세계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같은 레드 와인이라 해도 타닌Tannin(포도 껍질과 씨에 든 떫은맛을 내는 물질)의 강도에 따라 풀보디 와인과 라이트보디 와인으로 나뉩니다. 또한 고가의 와인과 저가의 와인이 공존하며, 좋은 빈티지와 나쁜 빈티지의 격차도 존재합니다. 어떤 와인이 어떤 음식과 어울리는지 그 차이도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프랑스라도 서남쪽의 보르도와 동남쪽의 부르고뉴는 여러 측면에서 상이합니다. 이 모든 이원론적 차이와 대비를 이해하는 것이 곧 와인 세계를 이해하는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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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차이는 와인의 제조 과정에서 출발합니다. 와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해 거대한 통에 집어넣고 며칠 두면 포도 안의 당분이 발효해서 서서히 알코올이 만들어집니다. 술의 성분이 많아지면 걸러서 오크통에 넣고 일정 기간 더 숙성한 다음 병에 집어넣으면 와인이 완성됩니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은 물론 샴페인, 로제, 아이스, 귀부 와인 등 모든 포도주 종류는 근본적으로 제조 원리가 비슷합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만드는 과정이 다릅니다. 이 차이를 모두 이해하고 나면 와인 종류가 왜 이렇게 다양한지, 종류마다 어떤 특징이 있는지 눈이 뜨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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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색깔을 기준으로 보면 레드, 화이트, 로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와인 색에 영향을 주는 성분은 포도 껍질에 함유된 색소 안토시아닌anthocyanin입니다. 포도 껍질에 담긴 안토시아닌의 함량이 와인 색을 결정합니다. 레드 와인엔 안토시아닌이 많지만 화이트 와인엔 안토시아닌이 적습니다. 안토시아닌은 붉은 포도, 블랙베리, 라즈베리, 아로니아 등의 껍질에 함유된 색소 배당체, 즉 색을 주는 물질입니다.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청포도에도 안토시아닌이 포함돼 있지만 붉은 포도에 비해 함유량이 적습니다. 대신 청포도엔 폴리페놀polyphenol이라는 성분이 있습니다. 폴리페놀은 항산화와 항암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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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와인은 포도를 수확해서 으깬 다음 곧바로 압착한 뒤 압착된 포도즙을 그대로 큰 통에 넣고 발효시키는 것입니다. 제조 과정이 매우 단순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레드 와인은 포도를 수확해 으깬 다음 큰 통에 집어넣고 곧바로 며칠 발효를 시킵니다. 한 차례 발효된 포도즙을 압착한 뒤 2차 발효를 시키는 게 다른 겁니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제조 과정 차이는 크게 보면 이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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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먼저 맛보게 하는 유일한 이유는 와인이 상했는지 아닌지 그것만 확인해달라는 취지입니다. 과거에 마셔본 그 향이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령 예민한 후각과 미각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와인은 생산 연도와 보관 상태 등에 따라 맛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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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 와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한자로는 ‘귀할 귀貴’와 ‘썩을 부腐’ 자를 씁니다. 한글로 풀면 ‘귀하게 상한’ 와인이란 뜻이지요. 귀부 와인의 원조는 헝가리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유명한 황금색 액체 ‘토카이Tokaji’가 헝가리에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토카이는 부다페스트 동북부에 위치한 와인 생산 지역입니다. 지역 이름이 곧 와인 이름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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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몽테뉴는 유명한 《수상록》이란 책을 남겼죠.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 사색한 결과를 에세이 형식으로 담은 책입니다. 보르도의 시장을 지낸 몽테뉴는 와인의 향미에 빠진 인물이었죠. 몽테뉴 가문은 대대로 부를 이어왔습니다. 소테른 지방의 최고 귀부 와인인 샤토 디켐 역시 몽테뉴 가문의 영지에서 생산됐습니다. 샤토 디켐의 소유주가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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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요즘 우리는 빼어난 냉동 기술을 앞세워 캐나다처럼 겨울이 춥지 않아도 아이스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혹한의 추위라는 자연의 힘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냉동고 속에서 포도를 얼려 같은 방식으로 제조하는 아이스 와인이 미국이나 호주 등에서 생산됩니다. 이런 아이스 와인을 ‘아이스박스 와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아이스 와인을 살 경우 와인 라벨에 ‘늦게 수확한late harvest’ 것이라는 표시가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 표시는 자연적 방법으로 만들어진 아이스 와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정말 포도를 얼게 한 다음 영하의 추위 속에서 수확해 만든, 즉 늦게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란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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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의 패전으로 영국은 잃은 게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고품질의 포도주를 즐길 수 없게 된 것은 영국 귀족들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보르도의 맛 좋은 와인을 그리워하던 영국인들은 새로운 와인 시장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눈을 돌립니다. 그러나 보르도에 비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은 상대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죠. 포도주의 장거리 운송은 필연적으로 맛의 변질을 가져옵니다. 특히 여름철에 와인을 수송해야 하는 경우 고온은 와인의 최대 난적입니다. 고온에 의해 와인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알코올 도수가 높은 브랜디Brandy를 와인에 섞는 방법이 나왔습니다. 강화 와인이 생겨난 배경입니다. 브랜디는 코냑 같은 포도주 증류주를 말합니다. 도수가 40~60도로 알코올 함량이 높다보니 이를 와인에 섞으면 장기 보관이 가능했습니다. 강화 와인은 일반 와인에 알코올 원액 또는 오드비Eau de vie(브랜디 원액)를 첨가해 알코올 도수를 18 % 이상으로 높인 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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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셰리와 포트의 구분이 나옵니다. 스페인에서 만든 강화 와인을 통칭해 ‘셰리 와인Sherry Wine’이라 부르고 포르투갈의 강화 와인은 ‘포트 와인Port Wine’이라 부릅니다. 셰리 와인이 발효 후 브랜디를 첨가한 주정 강화 와인이라면, 포트 와인은 발효 중에 브랜디를 첨가하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드라이한 셰리는 주로 식전 와인으로 이용되고 보다 달콤한 포트 와인은 식후주로 많이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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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졸레 누보는 해마다 9월 초에 수확한 포도를 4~6주간 숙성시킨 뒤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에 출시하는 술입니다. 보졸레 누보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1년 11월 13일이라고 합니다. 보졸레 지역에선 갓 생산된 햇포도주를 큰 통에 부어서 바로 마시는 전통이 있었는데, 1951년부터 지역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그 전통을 살려 1985년 특별한 규정을 선포합니다. 해마다 보졸레 누보는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 판매를 개시한다는 규정입니다. 그러자 세계 각국 와인 수입업자들이 보졸레로 몰려들어 그날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파원 시절 11월 셋째 목요일 밤 파리의 식당에서 보졸레 누보를 마시며 노래 부르는 손님들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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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물’은 프랑스어로는 ‘오드비’로 불립니다. 별로 맛과 향이 빼어나지 않은 화이트 와인이 아주 매혹적인 술인 브랜디로 탄생했는데, 그 출발 지역이 바로 술 이름 ‘코냑’의 탄생지인 프랑스 코냑 지방입니다. 브랜디는 화이트 와인을 증류해서 만든 술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로, ‘과실을 발효한 술을 증류해서 만드는 증류주’로 정의됩니다. 알코올 도수는 35~60도로 비교적 독한 술이며 유럽에선 주로 식후주로 널리 사용됩니다. 브랜디의 어원은 네덜란드어 ‘브란데웨인Brandewijn’에서 나왔는데 ‘불에 태운 와인’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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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냑의 제조 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포도를 수확해 화이트 와인을 만듭니다. 그해 가을 만든 와인을 그 겨울에 증류하기 시작해 2~3개월 후 봄이 되면 증류를 마무리해서 생명수라 불리는 오드비를 얻습니다. 이후 오크통에서 숙성시킵니다. 면세점 등에서 코냑 같은 브랜디를 사려고 보면 다양한 숙성 연도를 의미하는 표기가 존재합니다. 코냑이나 아르마냑을 접할 때 VS, VSOP, XO로 표기된 것은 등급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나폴레옹Napoleon’은 XO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따라서 ‘나폴레옹 코냑’이라고 하면 대개 최상급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같은 고급 증류주인 아르마냑의 경우 ‘오르다주Hors d’Age’는 10년 이상 숙성한 브랜디에만 붙이는 게 코냑과는 다른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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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베르네 소비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포도알이 일반 레드 와인 품종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 크기로 작다는 점입니다. 마치 블랙베리나 블루베리처럼 말이죠. 알이 작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포도알 하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다른 품종에 비해 과육이 작은 대신 껍질이 두껍고 씨가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다른 포도 품종에 비해 타닌이 많겠지요. 산도 또한 센 편이고 병충해에 강합니다. 타닌이 많다는 건 오랜 시간 숙성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카베르네 소비용으로 만든 와인은 진정한 맛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 적어도 8년에서 길게는 15년 정도는 지나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품종 가운데는 오랫동안 숙성하고 보관할 힘은 없지만, 과육의 향이 워낙 빼어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카베르네 소비뇽과 섞어서 포도주를 만들면 당연히 장기 숙성과 장기 보관이 가능하겠지요. 보르도의 명품 와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Merlot라는 포도를 혼합해서 만듭니다. 흔히 알려진 이름인 마고, 라투르Latour, 무통 로칠드 같은 슈퍼 1등급 와인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딸보Talbot 같은 와인도 대부분 적게는 60%, 많게는 70~80 %까지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포도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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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품종은 바로 부드럽고 온화해 마시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주는 포도 메를로입니다. 미국에선 영어식 발음으로 ‘멀롯’이라 부르기도 하고 ‘멜로’라고도 발음합니다. 메를로는 포도알이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통통하고 동그랗게 생겼죠. 크기도 더 굵습니다. 대신 껍질이 얇고 당분이 많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타닌은 주로 껍질과 씨앗에 많이 함유돼 있습니다. 따라서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타닌은 적고 당도가 높다보니 과일 향이 풍부하고 마시는 느낌도 훨씬 부드럽습니다. 달다는 건 당분이 알코올로 변할 경우 알코올 도수가 높아짐을 의미합니다. 타닌이 적고 당도가 높은 메를로로 만든 와인은 4~5년 후면 충분히 숙성돼 절정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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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성 기간이 짧다는 것은 오랜 숙성 시간을 요구하는 포도와 어울릴 때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10년 이상 오래 숙성시켜야 하는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빚은 와인에 메를로가 중요한 짝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좋은 파트너가 됩니다. 샤토 마고, 무통 로칠드, 샤토 오브리옹 등 대부분의 보르도 특급 와인이 환상의 짝꿍 둘을 혼합해서 만드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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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포도 메를로는 제게 각별한 와인 스토리로 남아,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가슴에 갈무리돼 있습니다. 저는 와인 강의를 할 때마다 “와인은 스토리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가격이나 품질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와인은 어떤 곳에서 누구와 함께 무슨 계기로 마셨는지, 그리고 그 향에 대한 소회를 기억하는 것으로 스토리 하나씩을 만들어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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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와인 역사의 출발은 17세기 중반입니다. 네덜란드가 영국보다 먼저 남아공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아프리카와 아시아 경영에 나섰습니다. 동인도회사의 두 번째 총독인 사이먼스 반 데르 스텔Simons Van der Stel은 포도 농사와 와인에 남다른 지식과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포도 재배의 최적지를 찾아냈는데, 바로 케이프타운 부근 해발 200~400미터 조건을 갖춘 천혜의 땅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명칭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스텔의 숲’이라는 뜻으로 ‘스텔렌보스’라 지었습니다. 그때 스텔 총독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프랑스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위그노 종교 난민들이 그곳으로 하나둘 스며들어와 정착했던 것입니다. 위그노 난민들은 그냥 몸만 오지 않았습니다. 포도 재배와 포도주 양조 기술까지 가져온 덕분에 케이프타운 지역 포도주 양조 수준은 단숨에 프랑스에 필적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위그노 전쟁은 1562년부터 1598년까지 프랑스 내의 구교와 신교 간 갈등에서 비롯된 종교 전쟁입니다.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는 프랑스 남부의 신교도들이 위그노인데요. 1598년 신교를 인정해주는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끝으로 전쟁도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신교도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면서, 위그노 가운데 프랑스 남부 보르도 일대에서 포도 농사와 양조 기술을 가진 다수가 남아공으로 옮겨왔습니다. 이후 스텔렌보스는 남아공 포도주의 성지가 됐습니다. 34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이 지역엔 200개가 넘는 포도원이 있고 지금도 전통과 기품이 있는 뛰어난 맛의 포도주를 많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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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시라로 불리는 포도가 왜 오스트레일리아로 넘어가면 시라즈로 바뀌어 불리게 된 걸까요? 그 해답은 19세기 프랑스 에르미타주에서 시라 포도나무를 호주로 옮겨 심어 호주 와인 산업의 서막을 연 주인공인 스코틀랜드인 제임스 버스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임스 버스비는 호주에 시라 포도나무를 성공적으로 이식한 뒤 맨 처음엔 시라 품종의 이름을 ‘시라스Scyras’로 잘못 옮겨 포도주 병 라벨에 표기했습니다. 한동안 ‘시라스’라 표기되던 이름이 오늘날의 시라즈로 변경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버스비는 중세 십자군 전쟁 이후 페르시아에서 론 지방으로 와인이 유입됐다는 전설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러고는 시라와 발음이 비슷한 이란의 고도 시라즈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시라즈라는 포도 품종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고 BBC는 설명했습니다. 결국 시라와 시라즈는 한 몸, 즉 같은 포도 품종이라는 얘기입니다. 프랑스와 미국 나파 밸리, 칠레 등에서는 시라로 부르고, 호주와 남아공에서는 시라즈로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이제 시라와 시라즈라는 이름이 왜 혼재하는지, 두 품종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등 여러 궁금함이 다 풀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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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닌이 많은 포도로 담근 포도주는 오랜 시간 숙성 활동을 하는데 대개 오크통에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동안 계속해서 숙성을 이어갑니다. 오크통에서 나와 병입된 이후에도 숙성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타닌 함유량이 많은 포도로 빚은 와인과 적은 포도로 빚은 와인의 알코올 도수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알코올 비중을 결정하는 요소는 당도입니다. 7~8월의 뜨거운 햇살을 잘 받으면 포도의 당도가 급격히 치솟습니다. 당도가 알코올 비중을 결정하는 주역이라면 타닌은 보조 역할을 합니다. 타닌 함유량이 많은 포도로 만든 와인은 상대적으로 타닌이 적은 포도로 만든 포도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게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타닌이 적은 로제나 화이트 와인보다 타닌이 많은 레드 와인의 알코올 비중이 높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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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에서 빈티지가 왜 중요한 것일까요? 와인폴리닷컴www.winefolly.com에 따르면 ‘빈티지는 포도가 수확된 해’를 의미하며, 와인의 빈티지는 맛이나 품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품질에 미치는 영향은 포도가 여무는 시기의 기후에 의해 좌우됩니다. 유럽이나 북미 같은 북반구의 포도밭에서는 4월부터 10월까지의 날씨가 빈티지를 결정하고 호주, 남미, 남아공 등 신대륙 포도밭에서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의 날씨가 결정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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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는 영국과 프랑스의 왕가가 혼인 관계를 맺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어로 ‘포도를 수확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는 ‘vendanger(방당제흐)’입니다. ‘수확’이란 뜻의 명사는 ‘vendange(방당주)’입니다. 그런데 15세기 프랑스어는 ‘방다주’로 발음되는 철자를 썼습니다. ‘vendage’가 오늘날의 방당주, 수확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현대 프랑스어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발음하기 부드럽게 ‘n’ 음가가 추가됐습니다. 프랑스 와인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영국 사람들은 ‘포도의 수확’이란 뜻을 가진 ‘vendage’를 영어식으로 ‘vintage’라 불렀습니다. 물론 ‘수확하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로는 ‘harvest’나 ‘reap’도 있고 명사형 ‘수확’의 의미로는 ‘crop’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 상류 사회에서는 15세기부터 ‘포도 수확’을 칭할 때만큼은 ‘vintage’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영어에서도 처음엔 포도의 경우 ‘수확’의 의미로 빈티지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수확된 해에 따라 포도와 포도주의 품질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휘의 뜻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수확’ 자체의 의미보다 ‘수확된 연도’의 의미로 전용된 것입니다. 요즘 프랑스어로 빈티지는 밀레짐이라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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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와인의 향을 표현하는 용어인데, 아로마는 무엇이고 부케는 또 무엇일까요? 포도주가 독특한 고유의 향을 내는 까닭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포도 품종 자체가 내는 향입니다. 두 번째는 포도가 발효되면서 장기 숙성 전 오크통 보관 과정에서 얻어지는 향입니다. 세 번째로는 병입 후 수년 이상 거치는 장기간 숙성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향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흔히 1차 향, 2차 향, 3차 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로마는 ‘1차 향’을 말하는 것으로, 포도 품종 자체가 가진 고유의 향을 의미합니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피노 누아, 템프라뇨가 각기 독특한 향을 가진 포도 품종인 만큼 각각이 빚어내는 와인은 당연히 처음부터 다른 향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와인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수확해서 으깨어 발효만 시켜도 포도 자체의 향이 많이 변하면서 양조 과정에서 얻어지는 향을 띠게 됩니다. 이것을 ‘2차 향’이라고 부릅니다. 2차 향에는 두 가지 이상의 품종을 섞었을 때 오크통에서 만들어지는 향의 의미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이어 장기간 숙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향을 ‘3차 향’이라고 부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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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3차 향을 각각 쉽게 구분하기 위해 1차 향을 ‘아로마’로 칭하고, 2차와 3차는 ‘부케’로 부르는 구분이 오랫동안 계속됐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포도를 수확해서 양조를 거쳐 오크통에 들어간 초기까지 만들어지는 향은 대개 포도 품종의 차이 외에 의미 있는 차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편리하게 1차와 2차 향을 통칭해서 아로마로 부르는 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크통에서도 1년 넘게 숙성하다보면 고유의 독특한 향기가 조성되는 만큼 2차 향이 만들어지는 후반부와 3차 향이 만들어지는 기간의 포도주 향기를 합해서 부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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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병 밑바닥을 안쪽으로 쑥 들어가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어로는 ‘펀트punt’ 혹은 ‘딤플dimple’이라고 부릅니다. 와인 학계에서는 이와 관련해 정설은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블로파이프blowpipe를 이용해 와인 병을 만들 때 도구를 사용해 쉽게 작업하는 과정에서 펀트를 내는 것이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닥이 평평한 병은 마무리 처리가 완벽해야 하지만 펀트를 허용하면 그만큼 병 바닥 부분의 결함을 감춰주면서 병을 세웠을 때 안정성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와인의 침전물이 바닥에 가라앉게 해서 나중에 잔으로 따를 때 맨 마지막에 나오도록 고이는 공간의 역할을 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 와인을 잔에 따를 때 병의 바닥에 엄지손가락을 넣으면 병을 안정적으로 잡는 데 도움이 되는 면도 있습니다. 와인 동호인들 사이엔 펀트가 크고 깊을수록 와인 품질도 좋은 것이라는 속설이 퍼져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품질과 펀트의 크기나 깊이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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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자존심을 내세울 만한 상징으로 최고급 와인에 등급을 매겨 박람회를 찾는 손님들에게 내보이기로 했습니다. 1889년은 프랑스혁명 발발 100년을 맞는 해였는데, 프랑스 정부가 혁명 100년을 맞아 다시 파리 만국박람회를 유치했습니다. 제국에서 공화정으로 복귀한 프랑스 정부는 이 박람회를 기념해 아주 뜻깊은 건축물 하나를 선보였습니다. 파리 만국박람회의 관문이 된 기념비적 건축물인 에펠탑을 건설한 것입니다.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에 ‘붉은 풍차’란 뜻을 가진 ‘물랭 루주Moulin Rouge’라는 이름의 카바레도 같은 해 문을 열었다는 것 역시 재미있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