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넓얕을 열심히 들으며, 나와 비슷한 연배인 사람들인데도 지식도 많고 생각도 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참 좋다는 생각도 했다.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고, 특히 강연이나 세미나 혹은 모임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나인데, 이 사람들의 강연은 듣고 싶어졌다.

작년 11월에는 독실이의 강연을 들었고, 12월에는 채새장의 북토크를 들었다. 북토크,북콘서트는 뭐지… 라고 생소한 영어를 보며 강연일까? 했는데, 한글로 하면 ‘책 출간 기념 강연’ 정도가 되겠다. 사실 채사장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고, 이번에 책을 출간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채사장을 직접 만나 채사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북토크는 책 예약구매자에 한해 추첨을 통해 초대장을 준다고 하여 나는 책을 예약구매 했다.

채사장의 북토크는 자신이 쓰고있는 책들의 전체적인 관계, 그리고 이번에 출간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계. 나와 타인, 나와 세계, 나와 죽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와는 정말 거리가 멀었던 단어, 관계.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관계’의 정의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생각하는 채사장의 정의가 좋았다.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아래 적는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 선과 후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근원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

세계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에 의해 해석된 무엇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을 ‘실재론자’로,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관념론자’로 이름 붙여서 구분짓는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러한 용어로의 분류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다. 당신은 어떤 관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어떤 세계관을 당연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는가? p.32

 

‘세계’는 언제나 ‘자아의 세계’다. 객관적이고 독립된 세계는 나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해석한 세계에 갇혀 산다. 이러한 자아의 주관적 세계, 이 세계의 이름이 ‘지평,horizon’이다. 지평은 보통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말하지만, 서양철학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자아의 세계가 갖는 범위로 사용한다. 즉, 지평은 나의 범위인 동시에 세계의 범위다. 우리는 각자의 지평에서 산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너를 안는다는 것은 나의 둥근 원 안으로 너의 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너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 거다. 폭풍 같은 시간을 함께ㅔ하고 결국은 다시 혼자가 된 사람의 눈동자가 더 깊어진 까닭은. 이제 그의 세계는 휩쓸고 지나간 다른 세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더 풍요로워지며,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워진다. 헤어짐이 반드시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패도, 낭비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 마음의 파도가 가라앉았을 때, 내 세계의 해안을 따라 한번 걸어보라. 그곳에는 그의 세계가 남겨놓은 시간과 이야기와 성숙과 이해가 조개껍질이 되어 모래사장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을 테니. p.33-34

 

하지만 상식적인 시간관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 이외의 모든 것, 즉 사물, 동물, 타인은 원인과 결과라는 시간의 법칙에 얽매여 있지만, 나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의 시간은 중첩되고 역행하며 드러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나에게는 미래가 현재의 원인이기도 하고 과거가 현재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미래의 성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내면에서 원인이 되는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다.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현재는 미래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아의 내면세계에서 시간은 우리의 상식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사람은 자기만의 시간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현재에 살지만 다른 이는 과거에 살고, 또 다른 이는 미래에 산다. p.98-99

 

우리는 세계를 점검해봐야 한다. 나의 세계 안에는 무엇이 있고,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혹시 나는 고집스레 단일한 진리관을 움켜쥐고 빈곤하게도 이것만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닌지를. 또한 외부의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단순히 비진리라 규정해버림으로써 그것을 안 봐도 괜찮은 것들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던 것은 아닌지를. 당신이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점검해봐야 한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흑과 백으로 칠해진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깔로 빛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p.156-157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질문하거나, 질문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질문한다. 나는 특히 인류가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중요한 질문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의심이 오래될수록 의심이 실제처럼 느껴지듯, 질문이 오래될수록 질문은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p.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