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껴서 조금씩 읽던 랄랄라 하우스를 다 읽어버렸다. 산문집 중, ‘끌림’ 이후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끌림이 여행을 주제로 이국적인 곳에서의 풍경, 경험, 사람들을 통한 느낌을 들려주었다면, 랄랄라 하우스는 글쓰는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발견한 일상, 경험, 글들을 일반인들에게 공유해주었다. ‘끌림’보다는 작가와 독자의 경험이 비슷하고, 독자들도 접할 수 있는 글들이나 상황을 보여주는 측면에서 동경의 마음보다는 유쾌한 마음이 책을 읽는 내내 자리잡고 있었다. 주제가 있는 스크랩북처럼, 어찌보면 그저그런 이야기들이 비슷한 것들끼리 한데 모여 있으니 다들 더 빛나보였다. 이제 또 어떤 책이 나의 일상에 힘이 되어주려나. 소설을 읽은지가 오래되었다. 소설을 한 권 읽을까. 아래는, 랄랄라 하우스에서 마음에 들었던 글들의 스크랩-

나쁜 습관 독설가로 유명했던 마크 트웨인은 평생 골초였다. 생활은 불규칙했다.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인쇄소 견습공, 미시시피 강의 수로 안내인, 광산 기사, 신문 기자 등으로 일했다. 그런데 이 양반이 19세기 말에 증기선을 타고 적도를 따라 전 세계를 여행한 일이 있다. 그러면서 쓴 책이 그의 마지막 여행기’마크 트웨인의 19세기 세계일주’다.

그는 배 위에서, 음주벽 때문에 직장도 못 구하는 캐나다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 친구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담배와 금연 얘기로 건너뛰고 있다. 욕망은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커진다는 것. 그러지 않으려면 “그 욕망과 함께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걸 인정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이상 맹세같은 건 하지 않겠노라 결심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심한 요통 때문에 자리보전을 하게 된 마크 트웨인. 의사는 모든 치료를 다 해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며 담배를 줄이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커피와 차도 줄이고 과식도 삼가라고 말한다. 마크 트웨인은 그럴 수는 없다고 거부한다. 자기는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에 한번 입에 대면 젤제가 안 된다, 그래서 아예 끊으면 끊었지 줄이는 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의사가 떠난 후, 마크 트웨인은 의사가 말한 모든 ‘나쁜 습관’을 끊고 과식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요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건강도 되찾았다. 그러고는 다시 그 ‘기호품’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끝내면 마크 트웨인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발견한 ‘건강의 비결’을 어떤 부인에게 추천하리라 결심한다. 너무 쇠약해져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 부인에게 일주일 안에 제 발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 방법이란 “사흘간 맹세, 음주, 흡연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부인은 그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 ‘나쁜 습관’이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개탄한다. “버릴 만한 나쁜 습관이 하나도 없다니. 그야말로 도덕군자형 극빈자”라고 평한다.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무거운 화물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려야 할 상황인데, 그녀는 화물을 하나도 싣지 않은 배와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준엄히 결론을 내린다.

“나쁜 습관이란 젊을 때부터 몸에 들여놓아야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을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보험회사에선가 조사를 해보니 나이가 들수록, 즉 청년보다는 장년이, 장년보다는 노년이 건강하고 체력이 좋더란다. 혈압이 높을수록 건강하다는 결과도 나왔다고 한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건강해지기 위해선 일단 빨리 나이를 먹고 혈압을 높여야 하나? 물론 아니다. 이런 통계는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많은 중년과 노년은 젊은 층에 비해 운동과 섭생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더 건강한 것이고 젊은 층은 음주와 흡연을 많이 하고 노동 강도도 높기 때문에 그만큼 몸이 허약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조사 결과는 마크 트웨인의 독설처럼 젊은이들에겐 은밀한 기쁨과 우월감을 준다. 그것은 아직 ‘버릴’ 몸과 탕진할 젊음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나쁜 습관’이란 인생 최고의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음주와 흡연, 맹세(이것이야말로 정녕 나쁜 습관일지도!)를 삼가는 젊음보다는 이를 밥 먹듯이 하는 젊음이 보기에는 더 그럴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 최대의 사치를 즐기는 있는 중이므로. 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p51

좀 봐주시오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노교수께서 자동차를 운전하여 출근하려다가 그만 신호를 위반하여 젊은 경찰관에게 운전면허증 제시를 요구받게 되었다. 평소 풍부한 유머감각을 자랑하지만 동시에 씀씀이가 매우 알뜰하기도 그 양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막내아들뻘 되는 경찰관에게 사정을 하였다. “요 앞 대학교 선생이오. 수업에 늦을까 봐 그랬으니 좀 봐주시오.” 곧잘 통하던 수법이 왠걸,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매연과 미세 먼지를 들이마시며 준법정신 고취와 질서의식 함양에 몸 바치던 이 사명감 대단한 젊은 경찰관은 입가에 슬쩍 비웃음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께선 학생들한테 그렇게 가르치십니까? 어서 면허증 주십시오.” 말을 뱉어놓고 보니 자기도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경찰관은 괜히 모자를 한번 벗었다 다시 쓰면서 손만 쑥 내밀었다. 그래도 돈에 얹히는 게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운전자 쪽을 살피니 노교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네. 그렇지만 학생들이 봐달라면 좀 봐주긴 하지.” 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p.54

우리가 모르는 개들의 삶 엘리자베스 마셜 토머스라는 동물학자는 언제나 시베리아허스키 종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대학가를 어슬렁거렸다. 동물학자가 연구는 안 하고 게으름만 피운다고 눈총깨나 받았나 본데, 알고 보니 개의 생태를 연구하는 중이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동물이면서 이상하게도 연구가 잘 안 돼 있는 동물이 바로 개다. 이 학자는 개에게 어떤 인위적인 훈련도 시키지 않으면서 여러 마리의 개를 함께 키웠다. 그중에 미샤라는 개가 있었는데 이 개는 한번 집을 나갔다 하면 엄청난 거리를 돌아다녔다. 물경 330제곱킬로미터가 녀석의 행동반경이었다. 토머스는 뒤를 쫒기로 했다. 미샤는 길모퉁이에 오줌을 싸 흔적을 표시하고 다른 개들을 만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또 다른 개를 만나 인사하고 오줌 싸고 인사하고 오줌 싸고 인사하고 오줌싸고. 이게 전부였다. 교미도 하고 먹을 것도 주워 먹으리라 생각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먼 길을 돌아다니는 걸까? 토머스는 결국, 사교야말로 외출의 진정한 목적이라는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친구도 만나고 ‘별일 없었나?’ 안부도 묻고 그러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p.79

스타벅스적 삶 1 ‘스타벅스’니 ‘커피빈’이니 ‘시애틀즈베스트’니 하는 미국식 커피 프랜차이즈들의 증식 속도가 무섭다. 이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우선 손님을 줄 세운다.(앉아서 느긋하게 메뉴판을 보던 즐거움은 어디로 갔는가.) 직원들은 유니폼을 입고 있으며 그들 머리 위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커피 이름이 적혀 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가 뒤섞인 커피 이름들은 신참 고객들을 주눅 들게 만든다. 프라푸치노가 뭔지, 블렌디드가 뭔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다. 먹고 알아내는 수밖엔. 그리고 이들은 모두 마일리지 카드를 발행하고 있다. 열 잔을 마시면 한 잔을 거저 준다는데 그거 한번 얻어먹으려면 매번 온 지갑을 다 뒤져야 한다. 겨우 주문에 성공한 손님들은 직원의 지시에 따라 옆으로 이동해야 한다. 거기서 자기가 주문한 것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마침내 자기 커피가 나오면 감지덕지 받아 들고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커피 나왔다며 손님 부르는 소리는 끝없이 이어지고 커피 가는 소리는 또 왜 그리 요란한지. 그런데도 직원들은 모두가 씩씩하고 태연하다. 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는 미국을 본다. 언제나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그 이상한 나라를. 2 미국식 커피 프랜차이즈들은 질문이 많다. 어느 미국 영화의 주인공은 스타벅스를 일컬어, “커피 한잔 시킬 때마다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되는” 커피숍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정말이다. 카페인이냐 디카페인이냐, 뜨거운 거냐 차가운 거냐, 작은 거냐 큰 거냐, 아니면 왕창 큰 거냐, 여기서 마실 거냐 가지고 갈 거냐, 머그컵이냐 종이컵이냐, 마일리지 카드는 없느냐, 혹시 케이크는 안 먹느냐, 묻고 또 묻는다. 손님들은 그때마다 대답을 해야 한다. 일단 그 자리에 선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스핑크스의 질문인 것이다. 그래서 단골들은 자주 먹는 것을 정해놓는다. 그래야 직원의 날카로운 질문에 진땀을 흘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뭐 좀 새로운 거 하나 마셔볼까 생각하면 허둥대게 된다. 음, 어, 네, 아, 그래요, 음, 네, 얼마요? 아, 네. 이런 대화를 하고 옆으로 이동하여 기다리면 내가 주문했다는 커피를 받아 들게 되는데 도대체 왜 이 커피를 주문하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마시려던 커피가 정말 이 아이스 화이트 프라푸치노 톨 사이즈였단 말인가? 혼란스럽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게 미국식 삶의 요체다. 다 마신 후에 빈 잔을 반납하는 것도 손님의 신성한 의무다. 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P.150

낭독의 발견 가끔 강연 요청을 받는다. 서점 혹은 학교에서 와주십사하는데, 강연의 주제는 ‘자유’라고 한다. 그러니까 와서 아무 얘기나 해달라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내가 ‘작가’이기 때문일 뿐, 다른 아무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가르치는 자라기보다는 배우는 자에 가깝고 소설을 한 권 썼다고 해서 누구 앞에서 떠들 권리를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말보다는 글에 능하다.(그러니까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겠지만.) 그런데도 책을 새로 내거나 하면 흔히 강연 요청들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선비이거나 또는 최소한 선생이던 시절의 유물일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부터가 남다른 배움의 표지이던 시절의 흔적일 텐데,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 굳이 작가의 강연을 들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책으로 낼 수 있는 시대에 굳이 그것을 입으로 떠들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군부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장면들이다. 다란나라에서는 작가들이 강연보다는 낭독을 한다. 책이 새로 나오면 그 책을 들고 순회 낭독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가들은 ‘자유’주제의 강연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자기 책중에서 한 부분을 골라 서점 같은 곳에서 독자들 앞에서 읽는다. 서점들은 따로 공간을 마련하지 않고 매대를 조금 밀어 약간의 공터를 만드는데 책 더미 사이에 작가와 독자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가뿐 아니라 대단히 분명한 메세지를 가진 정치, 사회과학 쪽 책의 저자들도 그렇게 한다. 독자들은 몇십 분 동안을 참을성 있게 듣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작가에게 질문을 한다. 작가들은 답변을 하고, 그 모든 것이 끝나면 자기 책을 들고 온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준다. 작가가 강연을 하는 사회와 낭독을 하는 사회. 연원을 따져 들어가면 더 깊은 문화적 전통이 드러나겠으나 일단 지금으로서는 우리 사회에 낭독의 문화를 들여오는 것은 어떨까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올 초 동료 작가들과 함께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우리 작가들은 청중들 앞에서 자기 소설을 한국어로 읽었다. 그러면 발성이 좋은 독일인 연극배우 등이 그 작품을 독일어로 읽었다. 청중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 낭송도 참을성 있게 들었고 독일어 낭송은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우리 작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우리를 변화시켰다. 작가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책을 내게 되거든, 강연보다 낭독을 하자고, 그렇게 출판사와 서점, 학교들을 설득해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한 분은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아예 새 책의 발표회를 낭독회로 대신하자는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책이 나오면 그것의 교정쇄를 일간 신문의 문학 담당 기자에게 미리 보내 책이 나올 때쯤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없애고 기자들과 독자들을 모두 한곳으로 불러 그곳에서 작품을 낭독하고 필요한 책 혹은 자료를 배포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낭독회에 참여하여 누구보다 먼저 신작의 한 귀퉁이를 맛볼 수 있고 한쪽에 마련된 가벼운 음식을 먹으며 다른 독자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개봉 영화의 시사회를 닮은 이런 행사가 과연 출판계에도 잘 먹힐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신선한 기획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다른 작가들이 끼어들었다. 한 작가로는 ‘흥행’이 잘 안 될 수도 있으니 세 사람으로 팀을 짜 투어를 다니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신문이나 방송에 중계를 하면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어쨌든 그 자리에 참석한 작가 중 누구도 낭독 문화의 도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게 나로서는 신기했다. 그야말로 ‘낭독의 발견’이었다. 자기 책을 조용히 읽는 작가와 그것을 귀여겨듣는 독자의 만남을 기대해본다. 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p.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