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복막염 (Jan 30, 2020)
7일 전, 프라이데이 중성화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을 했고, 사전검사를 했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정밀 검사를 했다. 그리고 주요 수치 상으로 복막염이 의심이 된다고 했다. 고양이 복막염은 치사율이 거의 100%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신약이 개발되어 치료가 가능 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매우 비싼 가격.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12주동안 매일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내가 빼놓지 않고 매일 병원에 갈 수 있는 여유도 없고(휴직을 하던지, 직무를 변경하던지), 프라이데이가 요즘엔 병원에 가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하기 때문에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든다.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가족이었다면 어땠을까? 가족이 완치가 힘든 암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이 비유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죄송하다). 치유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시도해볼 수 있고, 시도해볼 수 있으나 매우 고통이 따르는 상황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과 고양이의 차이, 그리고 몸이 아픈 본인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느냐이다. 프라이데이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의사표현은 ‘정말 싫어.무서워’ 이다. 그렇다면 집사인 나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나는 내가 암에 걸리거나 불치병에 걸린다면 굳이 병원에서 그 힘든 치료를 받지 않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그 고통을 감수하고 주변을 힘들게 하고 삶을 연명하는 것이 과연 몸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존재가 선택해야할 길인 것일까? 언젠가는 죽을 존재가 말이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연명하는 삶이 얼마나 의미있을 것인가?
그렇게 왜 나에게 고통을 주는지 모르는 일상을 지내며 연명당하는 고양이의 삶은 어떤 의미일까?
고양이는 고마워할까? 나를 미워할까? 어서 이 고통이 끝나기를 바랄까?
과학에 기반한 서양 의학의 학문과 기술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을 최상위 가치와 목표로 삶는 것이 항상 옳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치와 목표는 법과 윤리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고 올바른 인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나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나쁜 상황’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 ‘예외적 상황’까지 사전에 판단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암치료를 위한 의료용 대마를 수입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사례라고 생각한다. 식물인간이 된 가족이 있는 경우, 본인이 원하는 안락사 등등. 그런 의미에서, 의식적 존재가 아닌 고양이에게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랜 기간 매일 큰 고통을 안기는 것은, ‘생명 유지’가 아니라 ‘학대’라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아직은 생각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절주절 적어본다. 그리고 정말로 프라이데이가 점점 아파진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능하면 매일, 프라이데이의 일상에 대해 한 줄 씩이라도 적어보려고 한다.
오늘, 프라이데이는 병원에 다녀왔고, 일주일 간 염증약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수치는 조금 더 안좋아졌다. 의사는 염증약을 더 먹여도 수치가 좋아지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지금껏 사료에 영양성분이 더 많이 들었을테니, 가능하면 사료를 많이 먹이고 간식은 조금씩 주고 있었는데 이제 프라이데이가 원하는 만큼 간식을 줘야겠다. 오늘 병원에 다녀와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프라이데이는 캣폴 꼭대기에서 잘도 쉬고 있다. 물론, 잘도 뛰어 논 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