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Aug 17, 2021)
일기 먼저.
게으름에 대한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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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속편하게 노는 것에 대한 수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능률 숭배로 인해 그러한 부분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을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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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의 무도회는 외진 시골 지역들을 제외하곤 사라져버렸지만 그들을 도야시켜 주던 그 충동은 여전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대체로 수동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영화를 보고, 축구 시합을 관전하고, 라디오를 듣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에너지들이 모조리 일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가가 더 있다면, 그들은 과거 적극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맛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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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오늘 적극적으로, 키보드의 키캡을 다 빼고 깨끗히 청소한 다음 다시 키캡을 끼우고 있다. 하루키는 그 새를 못참고 달려든다. 3일간의 휴식 동안 나는 이 여유로운 시간을 어쩔 줄 몰라하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허무하게 시간을 보냈다(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좀 읽었다). 이러다 한 달 쉬게 되면 난 그 어쩔 줄 몰라함 때문에 병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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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을 하다가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갔다가, 잠시 동안 하늘의 뭉게구름을 쳐다보았다. 아주 천천히 커져가고 있는 뭉게구름. 어렸을 땐 저수지 둑에 누워서 구름을 오랫동안 쳐다보고는 했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은 없었고 그저 멍때리며 풍경을 감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게 정말로 가능이나 한가 싶다. 그렇다고 무언가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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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친구들은 나를 보며 독거노인이라 했는데, 이제 정말로 서서히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평일 저녁 말없이 키캡이나 청소하고 있고, 고양이 사진이나 찍고 있고, 감자나 캐고 있다. 하지만 올해의 여름은 일 때문에 나에게 정말 힘든 시기였고, 이제 삶으로 다시 떠올라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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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드디어) 블루투스가 지원되는 Leopold의 기계식 키보드를 추가로 장만했다. 키감은 물론 옛날 것이 더 좋다. 역시 난 변화에는 익숙치 않다.
에세이에 대한 짧은 감상
유명해서 들어는 봤던, 얼마전 팟캐스트를 통해 내용을 조금 알게 되었던 책을 드디어 읽어봤다. 여러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첫번째, 책의 제목이기도 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먼저 읽었다. 시작 부분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이야기들은 없었는데, 중반 후반에서는 계속 표시를 해가며 문장들을 되새겨보게 되었다.
어쩌면 요즘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속편하게 노는 것’, ‘적극적인 에너지를 사용하며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 친구들과 축구를 하거나 당구를 치는데 온 마음과 신경을 집중하거나, 탱고를 추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던 것들, 자기계발이 아니라 아무 목적없이 혹은 이야기를 즐기고 감정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거나 영화, 드라마를 봤던 것들.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으로는, 그 시간에 코딩을 하거나 영어공부를 하거나 인문,과학서적을 읽는게 낫지 않겠어?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마음도,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은 누그러졌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하나. 그것 또한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하는 마음’이 아닌가.
이제서야 일이 아닌 것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혼자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좀 더 의식적으로, 여가(혹은 게으름)의 시간을 잘 가져봐야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 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의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다. … 미국의 경우는 예외지만 유럽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두 계측보다 존경받고 있는 제 3의 계층이 존재한다. 바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남들에게 일할 수 있는 은전을 베푼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러니 잘못하면, 내가 지주들을 찬양한다는 것으로 비춰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p.18
오늘날까지도 왕이 근로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려선 안된다고 주장하면 영국의 임금 생활자의 99퍼센트가 아마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p.20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p.20-21
사실 물질을 이동시키는 작업이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인간 생활의 목적이라고까지 강조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보다 인부 한 사람이 더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 우리는 두 가지 동기로 인해 오도되어 왔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할 필요성이다. 이 때문에 부자들은 수천 년에 걸쳐 노동의 존엄성을 역설해 왔다. 자신들은 그 부분에서 존엄하지 않아도 되도록 애써 배려하면서 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지구상에 일으키는 매우 멋진 변화들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에 있다. p.27-28
노동하는 사람들이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일을 생계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것이든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여가에서 나오는 것이다. 잠깐의 여가야 즐겁겠지만 하루 24시간 중 4시간만 작업하게 된다면 그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만일 현대 세계에서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명을 모욕하는 것이다. 과거 그 어느 시대에도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속편하게 노는 것에 대한 수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능률 숭배로 인해 그러한 부분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을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진지한 사람들은 영화를 보러 가는 습관에 대해 끊임없이 비난하며 그런 버릇은 젊은이들을 범죄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영화를 만드는 노동은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이기 때문에, 또한 돈을 벌게 해주기 때문에. p28.29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버는 것은 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악이란 얘기다. 그 두 가지가 거래의 양 측면이란 점을 생각할 때 그 같은 얘기는 모순이다. 차라리 열쇠는 선이고 열쇠 구멍은 악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품 생산에서 나온 가치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그 물품을 소비하는 행위에 의해 획득된 이익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p.29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이 반드시 불성실한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얘기는 하루 4시간 노동으로 생활 필수품과 기초 편의재를 확보하는 한편,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도록 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보다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나는 지금 소위 ‘지식인’으로 만드는 따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p.30
농부들의 무도회는 외진 시골 지역들을 제외하곤 사라져버렸지만 그들을 도야시켜 주던 그 충동은 여전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대체로 수동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영화를 보고, 축구 시합을 관전하고, 라디오를 듣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에너지들이 모조리 일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가가 더 있다면, 그들은 과거 적극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맛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p.30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분할 것이다. 신경 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느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가 시간에 지쳐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류의 오락거리들만 찾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는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가의 좋은 점은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모두가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할 것이므로 전쟁 취미도 사라질 것이다. p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