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 스테판 비알. 이소영 옮김 (Mar 20, 2014)
어렵지만 유익한 내용들로 가득 찬 책을 읽었다. 이번 책을 읽을 때는 꼭 독후감 형식으로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책의 내용을 정리하기에는 내공이 너무 부족하여 좋았던 내용만 발췌해서 정리하기로 했다.
서문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이 활동을 규정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마치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여, 또는 여러 목표들이 서로 부딪쳐 그림자만 흐릿하게 비추는 듯하다. 그렇다면 실용적이기 이를 데 없지만 도달하기는 만만치 않은 단순한 기능적 형태에 만족해야 할까?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금 고안해야 할까? 멋지고 세련된 물건을 만들어내야 할까? 환경에 책임을 진다는 제품을 사고 싶게 만들어야 할까? 그리고 진보라는 것을 아직 조금은 믿어야 할까? 저자에 따르면, 디자이너는 정신분열증 환자와도 같은 존재다. 맞는 말이다. 또한 여러 가지 제약을 결합시켜야만 하는 불가능한 묘기를 시도하는 곡예사이기도 하다. 한편에는 시장이, 다른 편에는 인간이 있고, 또 조형과 자연, 공장과 가벼움, 가난한 이들과 부자들이 있다. 이 제약은 끝이 없다. 한없이 밀려오는 모호함 속에서 현실에 대한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시도하는 이 직업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디자이너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 파트릭 주앵, 디자이너. p.8-9
4. 자본을 넘어
디자인은 구조적, 역사적 모순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선 디자인은 사회주의의 고안물이다. 영국에서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산업화에 맞서 저항하는 과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자인은 자본주의의 고안물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공업 생산을 받아들이면서 태어나 미국에서 ‘산업 디자인’이라는 형태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모순된 개념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것이다. 또한 그 어떤 활동을 정의할 때도 정치적 양면성이 이 정도까지 구체화되지 않는다. 사회주의적인 동시에 자본주의적인 것. 이것이야말로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요구다. 이는 산업 없이 산업 디자인을 하라는 말과도 같다. p.51
그러나 비판적 입장을 넘어서 디자인은 스스로 미치려고 애쓰지 않는한, 시장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바로 ‘올리베티Olivetti’브랜드와의 협력 작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다. 파파넥의 ‘현실 세계를 위한 디자인’이 출간되고 나서 두 해 뒤인 1973년 에토레 소트사스는 디자이너에게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이런 의혹에 대해 아주 시의적절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다들 나를 나쁜 놈이라고 한다’라는 제목의 저 유명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사람들은 다들 나를 아주 나쁜 놈이라고 하고, 다들 내가 디자이너라서 정말 나쁜 놈이라고 하며, 다들 내가 이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거라고-그리고 내가 나쁜 놈이라고-하고, 다들 누군가 이 일을 해도 잘해봤자 꿈속을 헤매기만 할 뿐이라고 한다. 다들 디자이너의 “오직 한 가지 목표는 생산 주기에 통합되는 것”이라고 한다. 다들 디자이너는 계급 투쟁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고, 사람들의 대의에 봉사하지 않으며, 그 반대로 체제를 위해 일하고, …… 체제가 그를 먹어버리고 소화시키며 그로 인해 더욱 잘 유지될 뿐이라고만 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디자인의 ‘원죄’로, 바로 이런 원죄를 들어 모든 악에 대해 디자이너를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이다.
p.53-56
이처럼 디자이너가 된다는 말은 윤리적 입장을 정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시장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이전 독일공작연맹 시대로 치면 표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한다는 말과도 같다. 바로 그런 이유로 디자인은 끊임없이 정당성을 추구하는데, 시장만으로는 디자인에 그 어떤 정당성도 부여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은 디자인에 단지 수단만을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시장 외의 다른 곳에서 자신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동시에 시장의 ‘위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 수단’이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디자인은 산업과 함께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산업을 받아들이면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공업 생산(대량 생산) 수단을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쌍을 이루는 소비사회(대량유통)를 윤리적으로 인정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디자이너들은 산업 디자인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트사스가 자신의 팸플릿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 언급은 타당성을 얻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야 그렇지 않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디자이너일 때 이것을 가지고 할 수 잇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 독일공작연맹에서 결국 표준을 인정하게 된 것처럼 현대 디자인은 결국 소비를 인정해야 한다. 산업 세계의 미래는 산업 세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이제 탄생하기를 그만두고 이제 산업 사회와 소비 사회라는 원칙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 할 때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꿈꾸게 만들어야 할 때다. p.58-59
5. 디자인의 효과
나는 디자인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디자인 효과’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를 통해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디자인은 어떤 공간이나 제품, 서비스이기 이전에 특히 그 공간이나 제품,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이는 디자인이 ‘존재자’가 아니라 ‘사건’이고, 사물이 아니라 반향이며, 소유물이 아니라 파급효과라는 뜻이다. 하라 켄야가 아주 적절하게 말하듯이 디자인은 “존재하는 사물things that are” 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사물things that happen”을 고안하는 작업이다. 달리 말해 디자인은 수행적performatif 사건이라는 얘기다. 디자인은 그 어떤 것이 되기 전에 그 어떤 것으로 발생한다. 나는 이런 현상을 ‘재복제reduplication’라고 일컫는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동시에 자신을 만든다는 뜻이다. 디자인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발생한다는 의미다. 이것이야말로 디자인의 현상성이다. 바로 그렇기에 디자인은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지 않고 오직 몇몇 조건에서만 나타나는 효과이기도 하다. 또 바로 그렇기에 산업은 그 어떤 디자인 효과도 발생하지 않는 수많은 제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또 바로 그렇기에 디자인 효과는 모든 산업적인 맥락 밖에서도 합당하게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은 무엇으로 구성될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해보도록 하자. p.63-64
첫째, 디자인 효과는 ‘형태조화callimorphique 효과’다. 디자인의 첫 번째 효과는 형태적 아름다움의 효과라는 의미다. p.64
둘째, 디자인 효과는 ‘사회조형 효과effet socioplastique’다. 디자인의 두 번째 효과는 사회 개혁 효과라는 의미다. 이말은 예술 형식을 창조하는 동시에 삶의 사회적 형태를 다시금 주조한다는 뜻이다. 함께, 그리고 나란히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디자인은 항상 ‘사회디자인sociodesign’으로, “사회를 조각하는”작업을 하는 문명의 창조자인 것이다. 더군다나 바로 여기에 디자인의 도덕적 토대가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디자인이 윤리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이는 유일한 방식은 ‘수단’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시장은 디자인의 특별한 ‘수단’이고, 디자인의 가장 본질적인 ‘목표’는 ‘자본을 넘어서’ 사회를 조각하는 작업을 하는 일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틀을 개선하고, 또 다른 삶의 방식을 구성하며, 미래의 커다란 문제들에 대처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p.66-69
셋째, 디자인 효과는 ‘경험 효과effet d’experience’다. 마지막으로 언급하지만 앞의 효과들만큼이나 중요한 효과다. 이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효과를 넘어서면서도 이를 결합시키고 확장시키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경험효과’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디자인은 특히 ‘사용자의 경험’에 작용하는 ‘사용의 경험empirie’을 증가시키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이다. p.71
디자인은 단지 필요한 사전 조건에 불과한 ‘사용 가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용 경험’, 즉 직접 사용하며 겪은 경험의 질을 다룬다. 왜냐하면 나는 그 어떤 경험의 질에 대한 제안 없이도 욕실이나 손목시계, 전화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용 경험을 하는 것이다. 샤워 부스의 배수 발판에서 물이 흐르고, 벽시계의 초침이 초를 가리키며, 귀가 찢어질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내게 전화가 왔음을 알린다. 그러나 내가 욕실을 이용하면서 감각적 즐거움을 맛본다면, 몇시인지 확인하면서 깜짝 놀란다면. 또는 전화를 사용하면서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나는 가장 평범한 행위 속에서도 쾌락의 발현을 경험하고, 이는 내 삶의 경험에 더 나은 존재의 질을 부여하게 된다. 이로부터 디자인이 공업 생산물은 물론 모든 기능적인 장치, 즉 사용자들을 가담시키는 모든 장치에 가져다줄 수 있는 엄청난 부가가치가 비롯된다. 이 부가가치는 자본의 너머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처럼 디자인은 매 순간 존재를 매혹시키려는 근본적인 필요에 부응하고 있다. p. 74-75
6. 프로젝트 작업
이런 의미에서 디자이너는 현실에 대한 기획을, 다시 말해 실현가능한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그 자신에게 고유한 창조적 방법을 사용한다. 그 첫 번째 방법은 ‘분석’이다. 디자이너는 조사를 하고, 자료를 찾으며, 정보를 얻는다. 맥락이 어떠하고 관계된 사람들이 누구이며 목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문제화’다. 디자이너는 의문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며, 질문을 던진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표현한다. 세 번째 방법은 ‘구상’이다. 디자이너는 상상하고, 발명하며, 꿈을 꾼다. 그는 해결책을 만들어내고 그 중에서 자신이 감당할 만한 것을 한 가지 골라 이를 옹호할 준비를 갖춘다. 네 번째 방법은 ‘드로잉’이다. 디자이너는 초안을 잡고, 도면을 그리며, 모형을 만든다. 그런 다음 프로젝트의 최종 형태를 창조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방법은 ‘설명’이다. 디자이너는 발언하고, 발표하며, 증명한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가 한 선택을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프로젝트’방식을 구성하는 단계다. 디자이너는 기획자로서 어떤 계획이나 의도, 의향을 내세운다. 또한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시각을 갖고 있는데, 이렇게 예측하는 능력이야말로 디자이너를 다른 모든 드로잉 전문가들로부터, 다시 말해 예술가(예술 작품으로서의 소묘)나 엔지니어(기술적인 제도)로부터 고유한 존재로 구별시켜준다. 결국 디자인을 한다는 말은 프로젝트를 구상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구상한다는 뜻은 무엇인가를 미리 계획한다는 의미다. 바로 그런 까닭에 디자이너의 창조 절차는, 그것이 예상 방식이라는 점에서, 또는 이탈리아어로 디자인을 ‘프로제타치오네progettazione’라고 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된다. 그리고 이는 세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 우선, ‘예상’의 의미에서 ‘존재론적 예측’이다. 디자이너는 우리의 존재를 앞으로 내던져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사회를 미래 속에 투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때, 디자인은 유토피아의 동인이 된다. - 다음으로, ‘표상’의 의미에서 ‘개념적 예측’이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앞으로 내세워야 한다. 다시 말해 국회의원이나 기업가, 엔지니어, 제조업자들이 디자이너의 의도를 하나의 전문적인 방식으로 떠올릴 수 있도록 현실을 예측한 상태를 구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술은 사회적 기능을 할 뿐이지만, 디자인은 하나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기획자를 통한 ‘소통’의 의미에서 ‘시각적 예측’이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우리의 눈앞에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프로젝트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이 이미지에 유효한 담론을 생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디자이너가 창조하는 방식이다. 왜나하면 프로젝트 작업이야말로 디자인 효과 발생이 예상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p. 82-84
7. 디지털 디자인
특히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은 컴퓨터 지원 설계CAD를 실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컴퓨터로는 하지 않는 일”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규정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럴테면 이들 중 일부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야만 하는 정보과학논리가 창조적인 사고를 억누른다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또 다른 이들은 기획자로서의 작업이 메뉴에서 옵션을 선택하는 단순한 일로 축소되었다는 점을 아쉬워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가르치는 학교의 동료들도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곧잘한다. 이들에 따르면, 드로잉은 가시적인 것을 해독하는 법을 배우는 데 대체불가능한 것으로, 드로잉을 한다는 말은 보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 건물과 물건의 형태적 구조를 해독하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할 때, 우리는 다른 경우에는 하지 않을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드로잉을 한다는 말은 이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크로키는 이들에게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조사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p. 91-92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이미 1762년에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어린아이들에게 드로잉을 가르치는 일을 옹호했다.
나는 내 아이가 기술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 정확한 시각과 유연한 솜씨를 갖추기 위해 이 기술을 연마하기를 바란다. …… 따라서 나는 아이에게 그림 선생을 붙여줌으로써 베낀 것을 또 베끼는 법만 가르치고 그림을 보고서만 그리게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나는 아이가 자연 이외의 다른 스승을 두지 않고, 사물 외의 다른 모델을 택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아이가 눈앞에 실물 그 자체를 둘 뿐, 이를 재현한 종이를 두지 않기를, 또 집을 보고 집을 그리고, 나무를 보고 나무를 그리며, 사람을 보고 사람을 그림으로써 물질과 외관을 유심히 관찰하는 데 익숙해지기를 원한다. 이것이야말로 관찰을 하면서 그리는 드로잉이 지니는 미덕이다. 요컨대 고전적인 생각이지만, 오늘날 많은 전문가들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p.92-93
1943년에 태어난 빌 모그리지는 영국의 산업 디자이너, 1979년에 최초의 노트북 ‘그리드 컴퍼스Grid compass’의 디자이너로 선정되었다. 1982년에 시판되어 1985년, 디스커버리 우주선에 탑재된 이 노트북을 위해 모그리지는 특히 모니터-덮개를 닫으면 컴퓨터가 꺼지는 원리를 고안했다. 그는 한 동영상 대담에서 “이토록 혁신적인 무엇인가를 제작하던 팀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능성을 갖춘 최초의 시제품을 제작한 1981년, 모니터 앞에 앉아 인터페이스를 조작하기 시작하던 그는 프로그램에 쏙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그는 만약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하고 싶다면, 인터랙티브 기술 그 자체를 디자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 때, 새로운 디자인 분야가 태어난 것이다. 모그리지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제품을 고안하는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직업을 더 이상 아름답거나 유용한 어떤 구체적인 물건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과의 상호작용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p.97-99
이처럼 ‘인터랙티브 디자인’은 제품만이 아니라 사용자와 제품 사이의 상호작용을 디자인의 대상으로 정함으로써 ‘사용자 중심 다지인’이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상호작용 지향 디자인’의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올바른 것은 아니다. 내가 앞에서 보여주려고 했듯이, 경험의 가치, 즉 사용 경험의 질에 기울이는 관심은 일반적으로 모든 디자인 절차의 근본적인 가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창적인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사용자에 중심을 둔 인터랙티브 디자인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p.106
하지만 무엇인가를 정의한다는 목표를 넘어서 디지털 디자인이 오늘날 제기하는 주요 문제는, 이 디자인이 단지 새로운 한 분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디자인과 같은 편에 위치하게 될지(즉, 제품 디자인, 공간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등에 디지털 디자인이 추가된다는 뜻인지), 또는 디자인 전반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됨으로써 기존의 모든 디자인 분야 속에 편입되어 디자인이라는 영역의 본질을 변화시키게 될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휴대용 단말기와 사물 간 인터넷IoT의 시대에 아직도 디지털을 제외하고서 제품 디자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 또한 ‘시티 2.0’과 위치측정 서비스의 시대에 공간 디자인과 건축은 더 오랫동안 디지털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모바일 웹과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그래픽 디자인은 여전히 ‘멀티미디어’를 이야기하는 차원에 머물러야 할까? 그리고 매일 프랑스인들이 미디어나 멀티미디어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평균 40.4회나 접촉하고 여가로 웹 서핑에 2시간 17분이나 할애하는 이 시대에 디지털 혁명 없이 종합 디자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 디자인이 디지털 속에 완전히 흡수될지, 또는 내 생각처럼 디지털이 디자인에 그저 흡수될지는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러기 전에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는, 프로젝트 수주명세서에 새로운 작업에 대한 제약으로, 이를테면 환경 보호 차원에서 가하는 제약과 같은 자격으로-그러니까 적어도 문제를 제기하기라도 한다는 차원에서-디지털을 제도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 111-112
8. 미래의 디자인
그러나 디자인 진흥원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혁신은 삶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실제로 브누아 엘브랭은 “브랜드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제안하는 ‘삶의 계약’ 같은 것이 아니라면 결국 성공한 혁신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의 계속되는 설명에 따르면, 혁신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물건들을 재구성하면서 개인들에게(소비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그리고 일관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삶의 각도’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처럼 혁신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보완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각도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디자인은 혁신과 함께 나아갈 수 있다. 단, ‘디자인을 통한 혁신’이 아니라 ‘혁신을 통한 디자인’이라고 문구를 뒤집는다는 조건에서만 그렇다. 이 말은 디자인을 혁신의 원동력으로 삼지 말고, 혁신을 디자인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수단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디자인은 그 자체로 목표이고, 혁신은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이때부터 성공적인 혁신은 “의미 있는 물건을 만들어 기업을 위해 가치를 창출하면서도 사용자에게 실제적으로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디자인과 마케팅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혁신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디자인은 윤리와 미학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브랜드를 드러내는 진정한 ‘브랜드 프로젝트’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브랜드’라는 말이 대상을 구별시키고 차별화하기 위해 첨부한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좀 더 본질적으로 의미의 세계와 가치를 창출하는 장치를 의미하고자 한다면, 이 개념은 대상의 사용 양상과 삶의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하나의 약속처럼 이해될 수 있다.
p.117-118
그렇다면 왜 여전히 혁신하려고 할까? 그리고 왜 여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할까? 이 점에 대해서는 베르나르 스티글러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우리로 하여금 처음에는 원하지 않는 새로운 제품을 채택하게 하기 위해 심리적 기술이 개발된다. 사회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제품에 대한 그 어떤 욕구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몇몇 사람들이 저소비 전력형 전구를 사용하거나 몇몇 제품이 환경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해서 현재 제기되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디자인의 힘만을 믿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이 길을 보여줘야 할 때가 왔다. 왜냐하면 “이것은 디자인의 문제로,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 시스템이 끼치는 환경적인 영향력의 80%가 구상 단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혁신은 단지 삶을 변화시키고 디지털을 도입하며 기여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혁신만이 될 수는 없다. 혁신은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p.126-127
생각하는 사물
다음으로 두 번째 단계는 아이디어를 낳는 수단으로서의 실험 단계다.(“만들면서 배우기Learning by making”). 통념과는 달리 창조적인 절차에서 구상은 결코 실현 ‘이전에’오지 않고 언제나 실현 ‘이후에’ 온다. 디자인을 한다는 말은 만들기 위해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기 위해 만든다는 뜻이다. 철학자 알랭Alain은 1920년에 이미 예술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아이디어는 예술가가 행함에 따라 찾아온다. 아니, 아이디어는 관객에게 그렇듯 뒤이어 찾아오며, 예술가 자신도 탄생하고 있는 중인 자신의 작품에 대한 관객이 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디자이너에게 이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고 확신하기 전에 많은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순간은 바로 ‘관념화ideation’의 순간이다. 프로토타입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고, 여기에서 어떤 아이디어가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실험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은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것이다. p. 131
하지만 ‘디자인적 사고’라는 개념은, 현대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을 규정하고 이론화하기 위해 그들 자신이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디자인 개념이라는 장점이 있다.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자 할 때 디자인은 철학적 몸짓과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찬사를 받아 마땅한 일인데, 왜냐하면 디자이너가 없이는 디자인 철학도 구축될 수 없기 때문이다.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