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Oct 31, 2012)
오랜만에 갔던 서점에서 또 책을 몇 권 집어왔다. 아주 가끔 들르는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게, 요즘 나의 마음과 관심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점에는 정말 다양한 책들이 다양한 제목을 가지고 비치되어 있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보며 무엇을 고를까, 신중하게 들여다 보니, 어쨌든 관심있는 것을 고르게 되겠지. 그래서 이번에 고른 책들 중 하나, ‘행복의 정복’. ‘정복’이라는 말이 ‘행복’이라는 말과 어울지 않는 느낌은 조금 있었지만 책의 내용을 잠깐 읽으니, 무서운 책은 아니었다. 요즘은 왜 이런 책들을 더 좋아하는지, 소설도 아니고 전문서적도 아닌 이런 책들이 요즘엔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너무 비유적인 표현의 것들은 별로다. 명확히 의견을 보여주거나 차라리 감성적인 것이 낫다. 이 책은 명확한 시선으로 말을 이어가서 좋다. 아래는, 읽으며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
2016.8.12. 다시 읽고. 요즘 목적은 잃은 채 순간순간의 결과를 위해 달리는 듯한 내 모습을 보면서,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역시 도움이 되었고 가끔씩 되새겨볼 만 하다. 이번에 글을 읽고 나서는, 내가 요즘 너무 좁은 세상, 사람들, 관심사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좀 더 다양한 주제에 대한 고민, 생각, 대화, 지식 습득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을 쓰거나 자기의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사례로 일반화된 개념을 설명하려는 측면이 보이지만, 난 언제나 이런 방식을 좋아한다. 이해하기 쉬울 뿐더러,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쉽고 그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더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사실 현대에 대한 크러치의 불평 중 하나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없어도 괴롭고 있어도 괴롭다면, 새로운 것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절망의 진정한 원인이 될 수 없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흘러내려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자. 염세주의적으로 본다면 여행은 불쾌한 것이 된다. 사람들은 여름이면 휴양지로 더났다가 본래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이 사실이 여름에 휴양지로 떠나는 일이 무익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강물에게 감정이 있다면, 강물은 셸리의 ‘구름’이 하던 대로 모험적인 순환을 즐겼을 것이다. p.34
사람들이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 이유를 밝혀보고자 한다. 우선 첫째로, 사랑은 그 자체가 기쁨을 빚어내는 원천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이것이 사랑이 지닌 가장 큰 가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 가진 다른 가치를 발휘하려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 사랑! 사람들은 지나치게 그대를 헐뜯는다. 그대의 달콤함이 스디쓰다고. 그대의 풍성한 열매가 너무나 달콤하여 다른 어떤 것도 따를 수 없을 때조차.
이 시를 지은 익명의 시인은 무신론에 대한 해답이나, 우주의 비밀문을 여는 열쇠를 찾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사랑은 기쁨을 주는 원천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는 것은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둘째로, 사랑은 아름다운 음악과 산에서 보는 해돋이, 보름달 아래 펼쳐진 바다와 같은 최상의 쾌락을 더 증폭시키기 때문에 소중하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아름다운 경험을 해보지 못한 남자는 이러한 경험이 주는 마법의 힘을 전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다. 사랑은 생물학적 협력의 한 가지 방식으로 자아의 굳은 껍질을 깨뜨릴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각각 느끼는 흥분은 상대방의 본능적인 목적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협력이 가능하다. p.43-p.44
다음에는 비극에 관한 크러치의 글로 넘어가자, 그는 입센의 [유령Ghosts]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King Lear]보다 못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동감이다.
표현 능력이 아무리 늘고, 글재주가 아무리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입센은 셰익스피어가 될 수 없다. 입센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입센에게는 셰익스피어가 창작했던 작품과 같은 소재들이 전혀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과 인간의 열정이 중요하다는 생각, 인생의 깊이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셰익스피어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신’과 ‘인간’, ‘자연’은 위축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현대 예술의 사실주의적 신조로 인하여 평범한 인간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 생활의 범상함이 우리들을 엄습해왔기 때문에 우리의 관점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실주의 예술 이론이 발전해 간 것이다.
왕자가 겪는 슬픔을 다룬 구식의 비극이 현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왕자의 슬픔을 다루는 방식으로 평범한 개인들이 겪는 슬픔을 다룬다면, 그 느낌은 다를 것이다. 우리의 인생관이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관이 진보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특정한 개인들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바라보지 않으며, 그들만의 비극적 열정을 지닐 권리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 몇몇의 영광을 위하여 악착같이 일만 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p.46-p.47
그러나 가벼운 흥밋거리나 오락에 빠져 생활하고 있는 젊은이의 마음속에 건설적인 목적이 들어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젊은이의 생각은 늘 멀리 있는 목적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에 쏠리기 쉽기 대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대는 소인배들의 세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느린 변화의 섭리와는 지나치게 멀어진 세대, 모든 생명력이 마치 꽃병에 꽂힌 꽃처럼 서서히 시들어가는 세대가 될 것이다. p.72
현대의 도시인들이 느끼는 특별한 퀀태는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삶은 사막을 여행할 때처럼 뜨겁고 답답하고 갈증에 시달린다. 돈이 많아서 마음대로 생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자.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들이 겪는 권태 가운데는 권태를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된 특이한 권태가 있다. 그들은 생산적인 권태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다가 훨신 나쁜 종류의 권태에 빠지고 만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p.74-p.75
이와 비슷한 상황들은 표면적으로 일면의 진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고질적이 된다. 어떤 사람이 직접 겪은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에 비해서 그의 마음속에 훨씬 깊이 각인된다. 이로 인해서 이 사람은 잘못된 균형감각을 가지게 되고, 일반적인 사실보다 예외적인 사실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 흔히 볼 수 있는 피해망상의 또 한 종류는 박애주의적인 유형으로,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는 그들이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놀라고 당황한다. 사람들이 선행을 베푸는 동기는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순수하지 않다. 권력욕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여러 가지 위장을 한다. 우리가 남들에게 유익할 거라고 믿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권력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선행을 하는 즐거움에는 또 다른 요소가 들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넒은 시각에서 보면 그 사람에게서 술, 도박, 게으름 따위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다. 이런 사례 속에는 많은 사회 윤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친구들의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쁜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질투심이다. …… 이들 실례로 부터 네 가지의 일반적인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원칙들에 포함된 진리를 충분히 깨달으면 피해망상을 적절히 예방할 수 있다. 첫째, 당신의 동긴느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이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둘째, 당신의 장점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셋째,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당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 넷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을 해코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당신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 이 네 가지 원칙에 대해 순서대로 간단히 언급해보고자 한다. 자신의 동기를 의심해보는 것은 특 자선가와 정치가에게 필요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 또는 이 세상의 일부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고, 이 전망을 실현하면서 인류 전체 또는 그 일부에 은혜를 베풀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때로는 옳고, 때로는 옳지 못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자신들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 인습적인 도덕은 어느 정도 이타주의를 강요하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으로 보아 이타주의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덕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이와 같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도달했다고 상상한다. 가장 고상한 사람의 행동도 거의 대부분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ㅇ벗다. 만약 이런 이기적인 동기가 없다면 인류는 존속하지 못할 것이다. 남들을 먹이는 데만 시간을 쓰고, 자신은 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곧 죽고 말 것이다. 물론 그는 악과의 싸움에 다시 뛰어드는 데 필요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동기에서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될지 의문이다. 식욕이 돌아야 침도 제대로 나오고 소화도 잘 될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공익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식사를 하는 것보다는 음식을 즐기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 더 좋다. p.126-p.130
모든 종류의 폭넓은 관심사는 긴장을 이완한다는 중요한 역할 외에도 여러 가지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사람들이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의 목적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 그리고 자기 나름의 일의 방식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인간이 수행하는 전체 활동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에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잊기 쉽다. “그런 사실을 잊지 말고 지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꼭 필요한 활동을 하면서도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짧은 일생 동안, 이 이상한 행성과 이 행성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습득해야 한다. 비록 불완전한 지식이더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하는 것은, 극장에 가서 연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같다. 세상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것, 영웅적이거나 기괴하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보여주는 이러한 구경거리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 베푸는 여러 특권 중의 하나를 포기하는 셈이다. p.240
행복의 정복 - 버트런드 러셀